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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03. 2016

[단편소설] 어느 날, 아침

이별한 남자들의 찌질한 순간

('# 1~4' 합본입니다.)


‘아, 집에 가야하는데 귀찮네.’

 희성은 출근할 필요가 없는 토요일인데도 지금 일어나야만 하는 오늘이 영 아쉽다. 가족끼리 가까운 곳에 나들이 가기로 해서 오전 중으로 집에 가봐야 한다. 평소였으면 어제 퇴근할 때 자취방이 아닌 집으로 바로 갔을 텐데 동료 공보의들과 스크린 골프를 치고 뒤풀이를 하느라 못 갔다. 술을 진탕 마셨더니 중간부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 방에서 마시길 잘했어.’

 치대를 졸업하자마자 공보의가 된 희성이 공보의로 배치된 지역에는 공사 문제로 관사 하나가 모자랐다. 2년 전에 지어졌음에도 부실공사를 한 탓인지 관사 한쪽 벽이 일부 무너지는 바람에 공사 중이었다. 그래서 신임공보의 6명이서 가위바위보를 했고, 꼴지를 한 희성은 관사 대신에 월세의 일부를 지원받게 되었고, 고민하다 자취방을 서부정류장 근처로 잡았다. 그리고 이내 그곳은 주변 공보의들의 아지트로 변했다. 제각기 관사가 하나씩 있었지만 지소 2층이라 여사님 눈치도 좀 보이고, 근처에 논밭 밖에 없는 시골이어서 놀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희성의 방 주변에는 술집을 비롯해 놀 것도 많으면서 교통도 괜찮아 어느 모로 보나 사람들이 모이기에는 최적지였다.


 다들 언제 갔는지 술자리가 그럭저럭 정리되어 있다. 베개가 두어 개 있는 걸 보면 몇 명은 자고 간 듯하다.



 ‘몇 시지?’

 8시 반이다. 슬슬 준비하면 10시, 늦어도 11시 안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다. 늦지는 않겠다. 희성은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가 다시 눕는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전기장판을 떠나기가 싫고 두려운 탓이다. 이불 밖에 도사리고 있는 찬 공기가 썩 반갑지가 않다. 갑작스레 맞이할 차가운 공기에 이내 잠이 깨겠지만, 샤워하다 따뜻한 물 맞는 기분이 좋아 계속 서 있게 되는 것처럼 나오기가 싫다. 그렇게 10분을 넘게 미적대다가 얼어붙어 있을 자신의 차를 떠올리며 결국 자리를 정리한다.



 ‘차 좀 녹이고 그러려면 시간 좀 걸린다. 일찍 준비해야 해. 오늘도 시동 잘 안 걸리면 어떡하지.’

 20만 km 넘게 달려 수명의 끝을 향해가는 희성의 차는 겨울만 되면 말썽이었다. 며칠 전에는 작년에 배터리를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동이 걸리지 않아 차를 놔두고 버스를 타고 출근해야 했다.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마중 나온 강우 형이 아니었으면 대책이 없었다. 빨리 공보의 생활을 끝내면 새 차를 사리라. 자리에 일어나서 밤사이 건조해져버린 목을 축이기 위해 냉장고를 열어 찬 물을 찾는다.



 냉장고 안에는 스파게티 소스, 신기해서 몇 개 사서 먹었더니 극악무도한 이국적인 맛에 놀라 장식용으로만 쓰고 있는 각종 동남아 주스, 종류별로 모아둔 수입 맥주, 너무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서 두고두고 먹고 있는 루이보스 티, 알로에 주스까지 온갖 것들이 들어있다. 오직 찬 물만 없다. 다 마셔놓고 새로 사온다 사온다 생각만 하고는 또 깜빡한 것이다.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때는 빨래, 설거지, 청소, 요리까지 무엇이든지 열심히 했는데 가면 갈수록 대충하게 된다.



 ‘칫솔이 여기 왜 있어.’

 냉장고에 어울리지 않는 칫솔을 밖으로 꺼내고, 알로에 주스를 페트병 째로 들고 마신다. 찬 기운이 식도를 따라 퍼진다. 분명 물을 삼켰는데 가슴이 쩌릿쩌릿하도록 시원한 것이 방금 들이마신 것이 마치 찬 공기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머리까지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아직 다 마시지 않은 알로에 주스 뚜껑을 닫고 다시 냉장고에 집어넣는다. 더럽지만 머 어떠랴 나 혼자 사는 집, 누가 머라 할 사람도 없는 나만의 왕국이다.



 속옷을 챙기고 보일러를 목욕상태로 바꾼 뒤 면도를 했다. 머리를 감으려 하는데 아무리 샴푸통을 펌프질해도 피식피식 소리만 들릴 뿐이다.

 ‘아, 맞다. 물 말고 샴푸도 사야했었는데.’

 통에 물을 부어서 남은 내용물까지 탈탈 털어 써놓고는 또 까먹은 무심함을 탓하며 희성은 여행용 샤워세트에서 샴푸를 꺼냈다. 그러는 사이 벌써 화장실 바닥은 첨벙 첨벙이다. 며칠 전부터 수챗구멍에 물이 잘 빠지지 않고 있다. 전에는 그럴 때마다 열심히 머리카락을 제거하고 가끔씩은 구멍에 손을 집어넣고 헤집어 물이 잘 빠지도록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좀 귀찮다. 어차피 주말 지나고 돌아오면 다 빠져있으리라.


 샤워를 하고 속옷을 입는데 고기냄새가 배여 있다. 어제 뒤풀이의 후유증이다. 스크린 골프 한 판 치고, 근처 오뎅탕집에서 소주 몇 잔 걸친 다음 돌아오는 길에 고기 몇 근을 샀었다. 전시용으로 있던 후추와 파슬리도 꺼내 데코까지 하며 허세 좀 부렸었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화장실에 있다가 나오니 그 전에는 못 느꼈던 고기냄새가 강렬하게 느껴진다. 아까 속옷 입을 때 예감은 했다만 좀 심하다. 얼른 후드를 켜고 창문을 열고 모든 옷에 탈취제를 뿌렸다.

 ‘오늘은 창문 열고 나가야겠네.’

 월요일 퇴근하고 자취방에 왔을 때의 냉골바닥이 걱정된다.



 책상 가장자리로 옮겨둔 컴퓨터를 켜서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태블릿으로 옮기도록 해놓고 간단하게 청소를 시작했다. 설거지도 하고, 바닥에 널브러진 『보통의 존재』는 책장에 꽂고, 내가 쓴 칼럼이 실린 조그마한 지역신문도 살짝 구겨진 것을 판판히 펴서 파일에 끼워두었다. 하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맥주제조 키트와 와인잔 걸이도 닦고, 청소하다 발견한 핫팩도 하나 뜯어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오늘 입을 코트는 디자인이 깔끔하니 좋았지만 대신 얇아서 좀 추웠다. 그리고 지금 운전대를 잡으면 얼음장 같을 것이 분명하다. 핫팩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충 마무리하고, 컴퓨터도 끄고, 가스밸브도 확인한 뒤 밖으로 나왔다.



 운동화를 신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문자가 왔다. 블랙 프라이데이 때 주문한 구두와 캐주얼화, 벨트가 국내로 들어왔다는 내용이다. 꽤 시일이 지난 탓에 그만 잊고 있었다. 싼 맛에 머 하나만 걸려라 식으로 5개나 주문했다. 이중에 2개만 성공해도 본전치기. 얼른 배송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 좀 걸리겠네.

 성에가 잔뜩 낀 앞 유리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난다. 차 문을 열고 앉으니 차갑다. 어째 바깥보다 더 찬 기운이 엉덩이를 통해 올라온다. 떨리는 마음으로 키 박스에 차 키를 집어넣고 돌린다. 용쓰는 소리가 들리지만 좀처럼 걸리지 않는다. 3번 만에 겨우 성공. 식겁했다.


 히터를 얼른 틀고 기다린다. 내부가 따뜻해질 때. 성에가 녹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에 내려앉은 먼지가 흩날린다.

 ‘내부 세차한지 얼마나 되었나?’

 손등이 간지럽다. 히터바람에 흩날린 먼지 안에 섞인 머리카락이 손등에 내려앉은 것이다. 머리카락을 집어 들었다.



 길다.

 많이 길다.

 내 것일 리가 없다.



 그녀의 머리 길이를 떠올려본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벌써 희미해진 모양이다. 사진 찍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었던 그녀와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였기에 가끔 그리울 때마다 쳐다 볼 수 있는 사진이 없었던 탓일까? 실은 사진 몇 장이 있기는 했다. 문제는 그녀가 사진 빨이 정말 안 받았다는 것. 어렴풋이 남은 내 기억속의 그녀가 못 생긴 사진 속 그녀로 덮어질까 두려워 일부러 보지 않았다.


 머리를 쓰담쓰담 해주는 것을 좋아했던 그녀. 그러나 이제 나의 손에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머리가 아닌, 먼지와 함께 흩날린 머리카락뿐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기차 안이었다. 3일 휴가를 내고 주말에 붙여 4박 5일로 내일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한 번 차를 몰기 시작하면 지하철이고 버스고 기차고 전부 타기 귀찮아진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고 마지막으로 도전한 기차여행이었다. 첫 날 순천만 정원에서 보았던 그녀는 여수에서도, 보성에서도 마주쳤다. 큰 눈에 뽀얀 피부의 그녀는 멀리서 보아도 주변과 확연히 구분되어 찾기 쉬웠다. 그리고 광주에서 담양 가는 버스에서도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는 운명처럼 보이겠지만, 대개 가고 싶은 곳은 정해져있고 그에 따라 한정된 기차노선과 시간을 맞추다 보면 결국 비슷한 경로와 차편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굉장히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그러려니 생각하던 나와는 달리 첫 여행 중이던 그녀는 그게 신기했나보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내 앞에 어느새 동그란 큰 눈이 있었다.



혹시 순천만이랑 순천만 정원 가보시지 않았어요?
네, 맞아요.
여수랑 보성도 갔죠?
네, 그쪽도 가시지 않으셨어요? 언뜻 언뜻 본 것 같은데?
맞아요. 맞아. 완전 신기하네요.
그쪽도 죽녹원이랑 메타쉐콰이어길 가는 거예요?
그쪽이 아니고 저 윤서예요. 거기도 가고 메타프로방스도 가요.
아, 저는 희성이에요. 경로가 같네요.
이 다음에는 어디가요?
저는 전주 갔다가 집에 가려구요. 윤서 씨는요?
아직 고민 중이에요.


 고민 중이라던 그녀와 함께 담양을 한 바퀴 돌고 광주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같이 했다. 그녀의 집은 대구였다. 집에서 차로 30분은 족히 걸리는 먼 거리긴 했지만 같은 지역에 산다는 동질감은 금방 마음의 벽을 허물게 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초등학교 선생님인 그녀는 방학을 맞이하여 여행을 왔다고 했다. 직업이 무어냐는 그녀의 질문에 치과 의사라 대답했고,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늘 하는 질문을 그녀도 했다.


가끔 왼쪽 아랫니가 욱신욱신 아파요. 왜 그런 걸까요?
한 번 볼까?
밥 먹었는데 어떻게 그래요. 안 돼.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도 그녀의 입 안을 내 눈으로 본 적은 없었지만, 만남에는 나중이 있었다. 한 번 갈아타야 해서 불편한 전주에도 같이 갔고, 대구로 돌아오는 시외버스에서는 손을 잡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었다.



 여행이 가져다준 떨림을 설렘으로 착각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시작부터 순탄하지 못한 연애였다. 짧은 글로는 표현하기 힘든 우여곡절 속에서,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다는 ‘썸’과 실제로 내꺼라 단언 할 수 있는 ‘연애’ 그 사이 어디쯤에서 우리는 출발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달려버린 기차가 방향을 바꿀 수 없듯, 관계는 점점 더 깊어져 갔고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 동안 쌓아올린 추억은 뿜어져 나온 화산재가 온 세상을 뒤덮듯 아직도 나의 일상에 묻어있다. 바람이 불면 저절로 흩어지겠거니 하며 일부러 닦아내지 않는다. 창틀의 먼지도 겉에서 슬쩍 보면 눈에 띄지 않지만. 닦고 나면 걸레를 검게 만들어 먼지의 존재를 느끼게 하지 않는가. 추억도 그럴 것이다. 지우려고 애쓰다보면 눈에 더 보이는 법이다. 그냥 시간이라는 바람에 흘려버리리라.


 사실 아침에 눈 뜨고 지금까지 마주쳤던 모든 것들, 그리고 그것들을 대하는 나의 생각. 아직은 그녀가 함께 했다.




 그녀는 집은 대구였지만 학교는 창녕에 있어 자취를 하고 있었다. 친한 형은 이상형을 ‘잘 취하는 여자 자취하는 여자’이라 종종 이야기했는데 그녀는 잘 취하지 않았지만 자취하는 여성이 갖는 연애의 자유로움을 한껏 느끼게 해준 사람이었다. 부모님의 눈치를 덜 보아도 되니 그녀는 자주 내 자취방에 자주 놀러오곤 했다. 반대의 상황은 꺼려해서 그녀의 집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초등학교 여선생님의 관사에 남자가 들락날락하는 모습은 입초시에 오르내리기 쉬운 법이니 별 불만은 없었다.


 그녀는 전기장판을 깔아서 따뜻해진 침대를 무척 좋아했다. 자기 학교 관사에는 불난다고 전기장판을 못 쓰게 해서 무척 아쉽다고 조잘대곤 했다. 그렇게 같이 잠들었던 그 침대. 거기서 나는 이제 혼자 잠들고 일어난다. 많이 왔다한들 혼자 쓴 날이 더 많건만 마치 늘 내 옆에 있다가 사라진 것처럼 허전하다.



 9시까지 출근하면 되었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8시 전까지 출근해야 했고 아직은 임용 초년차라 눈치가 많이 보이는 막내였다. 차가 아직 없어 시외버스를 이용해야하는 그녀였기에, 내 방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날은 6시 반에는 일어나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여자이기에 준비할 것이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도 늦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미녀는 잠꾸러기라는 고리타분한 옛 이야기가 절로 나올 만큼 잠이 많았다. 주말에 연락을 하면 안 받을 때가 좀 있었는데 그건 자고 있는 거였다. 3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2시 반이 돼서야 일어나 약속 장소를 대구에서 창녕 시내로 옮긴 적이 있을 정도. 그러다보니 아침만 되면 맥을 못 추기 일쑤였다. 따뜻한 전기장판이라는 안식처에서 차가운 공기가 도사리는 현실로 나서는 게 싫었던 것도 한몫했으리라. 그래서 초반에는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모습을 누워 지켜보고는 배웅 정도만 하고 다시 잠들었지만, 잠투정부리는 모습이 점점 마음에 걸려 같이 일어나 준비를 도왔고 직접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 준 적도 많았다. 차안에서 졸린 눈으로 화장을 하는 모습이 보면 안쓰러운 것이, 결혼하면 집안일만 할 수 있도록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잠시 망상이 폭주한 것이다. 헤어진 지금, 그 때를 되돌아보면 참으로 웃기기 그지없는 장면이다.



 ‘내부 세차 좀 하긴 해야겠다.’

 서서히 녹아가는 성에를 바라보며 희성은 생각한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금요일에는 항상 방청소와 세차를 했다. 혹여나 그녀의 흔적이 부모님의 눈에 띌까봐 걱정돼서였다. 예전 술자리에서 강우 형이 자기 큰아버지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우리 큰 아빠가 좀 재미있으신 분이거든. 어떤 정도냐면 내 사촌동생이 서울에서 자취를 하는데 방에 가니까 다 청소가 되어 있는 거야. ‘음? 머지?’ 하면서 방을 살펴보니까 냉장고에는 엄마 반찬이 있길래, ‘아~ 엄마 왔다갔나?’ 하고는 탁자를 딱 보는데 흰 종이 하나가 있는 거야. 근데 그게 머였는지 아나?
머였어요?
그게 진짜 웃긴 게, 길이 순서대로 긴 여자 머리카락들 다 모아가지고 나란히 배열해놓고 그 옆에다가 메모를 딱 남겨놓은 거지



지우야. 머리카락 색깔이 두 개구나.

혹시나 싶어서 말하는 거지만 한 사람에 집중하도록 해.

두 여자에게 눈물 나게 하면 니 눈에는 피눈물 나.

서랍에 콘돔이 없더라.

아빠가 좋은 걸로 10개 사다두었다.

잘 쓰렴.


 그 말은 무심히 지내던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 이후로 집에 가는 주말이 되면 꼭 집과 차를 열심히 청소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아침에 타오르는 갈증을 해결하려 열었던 냉장고. 그 안에 든 잡동사니들. 모두 그녀의 흔적이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줄 목적으로 요리라 할 만한 것을 해본 적이 없던 나였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도전한 것은 그녀를 위한 ‘까르보나라’. 집에서 몇 번 연습했지만 그래도 못 미더워 보험용으로 스파게티 소스 완제품을 몇 개 사두었는데 다행히 성공적으로 파스타를 완성시켰고 그 소스를 쓸 일이 없었다. 그것들이 아직까지 냉장고에 잠들어있다.


 극악무도한 맛에 전시만 해놓고 있는 동남아쪽 주스들. 내 자취방에 놀러올 그녀에게 독특한 경험을 시켜주고 싶어 보건소 근처 마트에서 2개씩 사놓았던 것들인데, 같이 한 캔씩 먹어보고 영 입맛에 맞지 않아 그대로 봉인해버렸다.


 정말 코코넛만 넣은 것이 아닐까 싶게 느끼한 맹물 느낌의 음료. 새콤달콤할 것을 기대했으나 밍밍한 신 맛만 자랑하는 라임주스. 기대했던 만큼 파괴력은 없었던 바닐라 맛 음료. 레몬티 정도로 생각했지만 정말 레몬만 잔뜩 짜 넣은 것 같은 레몬주스. 한 캔 한 캔 마다, 그 음료수를 따면서 같이 공유했던 기대와 시간들이 담긴 채 그대로 냉장고를 채우고 있다. 먹기에는 맛이 없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것들. 디자인은 꽤 좋아 데코용으로 아직 내버려 두고 있다.



 그리고 수입 맥주들. 누가 초등학교 선생님 아니랄까봐 초딩 입맛이던 그녀는 맥주조차 달달한 수입 맥주를 선호했다. 머드쉐이크 초코, KGB 레몬 등등. 얼마 전 동네 마트에서 국군의 날을 맞이하여 군인 및 예비군에 한정해서 수입 맥주 6개를 만 원에 하는 행사를 했는데, 그때 그녀는 신나게 카트에 맥주를 쏟아 넣었다. 그게 아직도 남아있다. 난 드라이한 맛이 좋다.



 많이 만들어버린 루이보스 티. 남자 혼자 사는 방 특유의 냄새가 혹시 날까 싶어서 커피포트에 홍차를 자주 끓였다. 그래놓고 홍차는 또 썩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페트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물처럼 마셨었다. 그런 나와는 달리 그녀는 따뜻한 루이보스 티를 무척 좋아했고 올 때마다 끓여 마셨다. 지금 냉장고를 차지하고 있는 홍차도 그녀가 끓인 것이다. 버릴까 종종 생각하다가도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까먹어버리는 예의 그 무심함에 아직도 냉장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 그리고 ‘칫솔’. 그녀는 이상하게도 칫솔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시원한 느낌이 좋다라나 머라나.



 그녀는 머리카락이 길었다. 그녀가 샤워를 하고나면 그렇지 않아도 자주 막히는 수챗구멍이 더더욱 말썽을 피웠다. 항상 그것을 마음써하는 그녀를 위해 틈만 나면 화장실 청소를 했다. 더러워진 화장실을 보여주는 게 부끄럽기도 했고. 그랬는데 이젠 구멍이 막혀 물이 잘 안 내려가도 그냥 내버려둔다. 시간이 한참 걸릴 뿐 어차피 물은 다 빠지니까. 습기 차서 물때가 좀 생기면 어떠랴. 와서 흉보는 사람 없는데.



 성에가 다 녹았다. 앞 유리에 김이 살짝 서려 히터를 끄고 창문을 내렸다. 외부온도와 내부온도를 맞춰야 하는 까닭이다. 이렇게 김이 서린 것을 제거하려 창문을 내리면 그녀는 춥다며 모자를 뒤집어쓰고 웅크리곤 했다. 옆에서 보면 꼭 거북이 같아 그리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추위를 정말 많이 탔다. 그래서 겨울철에 그녀를 차에 태울 일이 있으면 항상 미리미리 조수석의 열선 시트를 켜놓았다. 손을 호호 불어가며 기다리다 내 차를 보고 반갑게 뛰어 들어와서는 엉덩이 밑에 손을 깔고 앉아 따뜻함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귀여워, 내가 보는 날 만큼은 날씨가 추웠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곧잘 했었다.



 바람결에 내 옷에 묻은 고기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육회나 회를 좋아하고 소고기는 미디움이나 미디움레어로 먹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무엇이든지 푹 익혀 먹었다. 같이 스테이크 먹으러 갔을 때도 다시 더 익혀달라고 주문했던 그녀였다. 어제 고기 구울 때 뿌렸던 후추와 파슬리. 그녀를 위한 까르보나라 만들기 위해 샀었던 것들이다. 나오기 전 뿌렸던 섬유탈취제. 이걸로 서로에게 뿌리며 장난 쳤던 것도 새록새록 생각난다. 별의 별 것들에도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 짜증이 난다.



 책상 끄트머리에 놓인 컴퓨터. 침대에서 같이 영화 보려고 그렇게 해두었었다. 다시 원상복귀 시켜두려다가 그냥 두었다. 난방을 하더라도 바닥만 따뜻하지 윗 공기는 별로 안 따뜻해서 책상에 올려둔 채로 컴퓨터를 하면 좀 춥다.


 온 나라가 소지섭과 임수정의 로맨스에 푹 빠져 연인을 돌팅이, 아저씨 부르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공부하느라 TV를 보지 않았던 나는 전혀 몰랐었다. 어쩌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본 적 없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주변 사람들은 명작이라며 한 번 보라고 추천을 많이 했지만 무엇을 다운 받아 본다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 귀찮은 일이었다. 그녀가 내 방에 와서 보자고 조르기 전까지는. 1년에 적어도 한 번은 정주행한다는 그녀와 함께 방에서 불을 끄고 영화관처럼 해서 같이 보았었다. 헤어지는 날에도 같이. 드라마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이별을 고했고, 난 그 드라마의 여운에 빠져 지금도 종종 보고 있다.



 방청소를 하며 책장에 꽂은 『보통의 존재』. 여행 중에 이야기하다가 책을 좋아한다는 나의 말에, 그녀는 무심코 집어든 저 책이 마음에 들어 그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고는 두고두고 읽으려고 샀다고 했다. 그 말 듣고 바로 휴대폰으로 주문했던 책이다. 읽겠다 읽겠다 해놓고 전공 책 좀 펴보느라 반 정도 밖에 읽지 않았다.


 내가 쓴 칼럼이 담겨있는 신문. 그녀는 신문에 글이 실리면 나보다도 더 기뻐해주며 열심히 읽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꽤나 행복해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더 큰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고는 했다. 지금은 의욕이 없어서 몇 주 째 글을 쓰고 있지 않다. 다시 쓸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은 귀찮다.



 와인잔 걸이. 지난여름 근처 유원지에서 만들었던 DIY 제품이다. 제품 리뷰를 쓴 블로거는 쉽게 만든 모양인데 우리는 꽤 오래 걸렸었다. 치과 의사가 손이 그리 둔해서야 어디 쓰겠냐며 핀잔을 주던 그녀. 그때 당했던 굴욕을, 나는 수제 맥주를 통해 만회했었다. 비록 적당히 만든다는 것이 좀 많이 만들어 걱정했는데 맛이 좋아 둘이서만 마셨는데도 일주일 만에 동이 났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만들자고 했었는데, 남은 재료와 먼지 묻은 키트가 그 간의 일을 알려줄 뿐이다.



 지금 운전대를 데워주는 핫팩. 빼빼로데이 때, 손수 만든 빼빼로, 조그마한 인형, 직접 쓴 손 편지와 함께 선물상자에 담겨있었던 것이다. 빼빼로는 이미 다 먹어버렸고 인형은 같이 근무하는 동생에게 줘버렸는데 핫팩은 깜빡했다. 그녀가 준 선물은 이제 내 곁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남아있는 핫팩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그 걸 보고 가슴이 아리는 내 모습이 한심하기도 하다. 이거 하나만 쓸 생각이다. 나머지는 안 쓸 테다.



 출발하기 전 룸미러로 뒷 유리를 살피다 본 내 모습. 카키 색 남방, 갈색 니트, 짙은 회색의 코트. 본래 패션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겨울도 후드티 몇 개와 패딩의 조합으로 그냥저냥 보냈었는데, 그녀는 내가 후드티 입은 모습을 싫어했다. 니트 입는 것을 좋아하는 본인의 취향에 맞추어 셔츠와 니트 조합을 항상 추천했고, 그 조합에 패딩이 가당키나 하냐며 나를 끌고 코트를 사러나가 하루 종일 쇼핑한 끝에 샀던 게 바로 지금 입고 있는 코트다.


 이제 한국에 도착했다고 연락 온 구두와 캐주얼 화, 벨트도 그녀가 골라준 것. 엄청난 할인에 기뻐하며 결제하고 만난 블랙 프라이데이. 그날 우리는 헤어졌다. 그럴 거면 골라주지나 말 것이지. 지금도 나는 의문이다. 사이가 멀어지는 기미가 보였다면 모를까 별 다툼 없이 행복한 나날을 즐기고 있었는데,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차단된 내 전화번호만이 현실을 알려줄 뿐. 곧 도착할 저 신발들을 신고 다닐 수는 있을까?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따뜻해진 차와 깨끗해진 앞 유리와 뒷 유리. 달릴 준비를 모두 마친 차. 출근 시간대를 지나 한산해진 거리. 드라이브하기에 딱 좋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크게 틀고 따라 부르며 출발한다. 그녀와 함께 한 추억이 서린 그 장소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가는 것에 희열을 느끼며 집으로의 소심한 질주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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