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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29. 2017

[소설] 내려놓음 106 또 한 명의 어머니Ⅰ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06 또 한 명의 어머니Ⅰ





 방사선 종양학과 선생님과의 면담이 있자마자 통화를 했던 임 여사님. 항상 잊지 않고 가끔씩 먼저 연락을 주시는 분이었기에 경과가 나오면 가장 먼저 연락드리려 벼르고 있었다. 내가 이만큼이나 여사님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으스대고 싶었다. 하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연락을 드리려 꺼낸 폰에는 이미 여사님께서 보내신 메시지가 와있었다. 시간을 보니 신경외과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진료실로 들어갈 즈음으로 보였다.


쌤~ 치료 잘 받고 계시죠?
밥 잘 드시고 치료 잘 받고 완치되면 그때 한 번 뵈어요.
맛있는 거 많이 사드릴게요.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시고 우리 동완 쌤 파이팅~!


 임 여사님과 나의 인연은 작년 4월 중순부터 시작되었다. 1년차 때 보건소에서 근무하다가 2년차가 되면서 운수 보건지소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지소 여사님이 바로 임 여사님이었다. 그때부터 올해 1월 초까지 대략 10개월을 같이 근무했다. 고령에는 1년에 한두 번 인사이동이 있었는데, 임 여사님이 여기에 해당되어 보건소로 자리를 옮기시면서 떨어져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 반쯤 뒤, 나는 입원했다.



 수술 전후 뇌부종을 가라앉히기 위해, 종양 성장 억제를 위해 스테로이드가 많이 투여되었다. 그로 인해 미성숙 백혈구들이 많이 생성될 수밖에 없었고, 병원에서는 항상 감염에 유의할 것을 당부했다. 심지어 병원 내부에서는 독감이 유행하여 병문안 시간대를 통제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스테로이드 투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사선 치료가 시작되었다. 치료 기간 동안 감염이 있으면 그 즉시 치료가 중단되니 조심해야 된다고 병원에서는 경고했다. 그런 나에게 외출은 그림의 떡이었다, 입원 첫날부터 방사선 치료 마지막 날까지 약 10주 간은. 참다못해 떡을 몇 번 집어삼켜보기도 했지만 맛도 없고 속만 불편하게 만들었고, 특히 중이염 오해 사건이 있은 후로는 극도로 몸을 사리고 살았다.


 종양 자체 증상은 간질 부분 발작이었고, 하루 두 번 항경련제 복용으로 조절되었다. 항암 치료의 부작용 몇 가지들도 젊음과 한방 치료로 대강 해결했다. 따라서 힘든 건 오직 ‘지루함’ 그것 하나였고, 나를 무척 괴롭히는 문제였다.


 ‘병원에 입원해보는 건 어떨까? 그럼 다른 사람들이 병문안도 좀 오기 편할 거고 좋을 것 같은데. 아예 우리 학교 병원에 입원해버리는 거지. 그러면 전공의들도 다 동기거나 선후배이고, 교수님도 아는 분이고 그럼 심심할 일도 없을 거고. 거기서 살짝 노력만 더하면 한의학 공부도 될 텐데, 그럼 좋지 않으려나?’



 병원에서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집에서 지내고 있건만, 집에서는 또다시 병원에서의 시간을 꿈꾸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렇다고 해서 영 병원에 입원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또 아니었다. 멀리 갈 것 없이 중이염이 아닐까 걱정하던 그때 응급실로 내원했으면 바로 입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나의 행동은 어떠했는가? 입원하는 상황이 두려워 벌벌 떨었다. 대소변이 일일이 체크되고, 혼자만의 시간과 사생활들이 일체 허용되지 않는 그곳에 또다시 가기 싫어 발버둥 쳤다. 병원에서 주무셔야할 부모님, 또다시 소외될 동생 생각에 아득해했다. 요컨대 나는 그냥 현실이 싫어 그저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무작정 도망치고 도망치다보면 내 마음은 결국 운수에 가있었다. 불과 1~2년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고령군 운수면’은 힘들 때 찾아가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뛰어나와 반겨주며 위로해줄 것만 같은 고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운수를 그렇게 느끼도록 해준 분은 임 여사님이었다.



 공중보건의사, 줄여서 공보의는 대다수 보건소와 보건지소에 근무한다. 보건의료원이나 지정요양병원에서 일할 수도 있지만 소수다. 시/군/구 마다 하나씩 있고 규모가 제법 되는 보건소와는 달리 면 단위마다 하나씩 있는 보건지소는 규모가 작다. 그리고 운수지소는 그중에서도 더 작았다. 한의사인 나, 의사인 승현이 형, 행정을 담당하는 임 여사님 이렇게 3명이서 근무했다. 2000명 남짓 사는 시골 외딴 곳에 소수의 인원이 일하는 곳. 이때 일이 원활하게 잘 돌아가려면 둘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각자 자신의 맡은 바에 충실하고 상호간에 터치 없이 굴러가거나, 서로서로 챙겨주고 모자란 부분은 충고도 하며 끈끈하게 뭉치거나. 운수는 후자에 해당했다. 정말 가족처럼 지냈다.


 불과 나보다 한 살 어린 아들과 세 살 어린 딸을 둔 임 여사님에게, 타고난 어수룩함을 선보이는 내가 어떻게 비추어졌을지는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모자(母子)지간이 되어 있었다. 승현이 형도 그 분위기에 녹아들어, 터울이 좀 있는 남동생 역할을 맡았다. 여사님은 ‘으이구 답답이’ 하시며 이것저것 챙겨주시곤 했다. 귀찮아서 요리를 안 하고 대강대강 끼니를 때우는 내가 걱정되어 밑반찬을 해다 주시기도 하고, 세탁기를 돌려놓고 귀찮아서 잠시 미뤄두고 있으면 대신 널어주시기까지 했다. “아이고, 내가 동완 쌤 빤스까지 다 널어줘야 하고 못 산다.”하는 핀잔은 덤. 몇 년 전에 같이 근무한 공보의들도 가끔씩 여사님에게 안부 전화를 할 정도로 잔정이 많으시고 잘 챙겨주시는 분이었지만 나에게는 더 남달랐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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