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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29. 2017

[소설] 내려놓음 107 또 한 명의 어머니Ⅱ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07 또 한 명의 어머니Ⅱ





 부모님께서 병원비를 정산하고 약을 타러 가는 사이 여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아침부터 일거리가 많았는지 아니면 내 연락에 깜짝 놀랐던 것인지 전화기 너머의 여사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어! 동완 쌤.
여사님,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먼저 메시지 보내셨더라구요.
요즘 통 연락이 없어가지고 메시지 한 번 남겨봤지.
여사님 걱정하시는 줄도 모르고 그냥 무심하게 지냈네요.
많이 힘들지는 않았고요?
별로 힘든 거 없었어요. 정말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요? 처음에 승현 쌤 말 들을 때는 얼마나 놀랬던지, 돌팔이라니까. 백 돌팔이.
아, 그리고 저 방사선 치료 끝나고 약도 휴식기간이에요.
이제 11시에 꼭 잠들 필요도 없고, 오늘 경과도 확인했는데 경과가 무척 좋다고 하네요.
아이고 진짜 다행이다.
내가 우리 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랑가 몰라
엄마 맞네요, 정말 엄마.
그날 병원에 갔을 때도 울 거 같아서 고마 말도 별로 못하고 와서는 얼마나 후회되던지.
그날 별로 못 봐서 아쉬웠어요. 정말.
보고 싶네요, 여사님.
그럼 쌤님 우리 오늘 한 번 볼까?
승현 쌤이랑 나기 쌤도 불러서 운수팀 회식 어때요?
오늘 안 그래도 퇴근하고 승현 쌤이랑 스크린 한 판 치기로 했는데.
승현 쌤에게 연락 해봐요.


 치료 중에 있었던 일이나 그때 들었던 생각들도 이야기하고 여사님의 응원도 들었다. 악성 판정을 받고 그 다음 날 아침 전화했던 그때처럼 힘이 났다. 남은 이야기는 만나서 하기로 하고 승현이 형에게 전화했다. 치료 경과가 좋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나기 형까지 해서 4명이서 이따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도 정했다. 한동안 골프를 치지 않아 민폐가 될 테니 먼저 게임을 하고 있으면 중간에 합류하기로 하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점심 즈음이었다. 어머니는 늦은 출근을 하셨고, 나는 저녁 약속을 위해 하루 일과를 일찍 마무리했다. 자전거도 돌리고, 골프연습도 다녀왔다. 책도 읽고 병원에서 남긴 메모도 정리했다. 그리고 6시, 옷을 단디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먼저 모여 스크린골프를 치고 있는 골프연습장에 합류했다.


어떻게 오셨나요?
혹시 백승현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나요?
9번 방이네요.
감사합니다.


 안내대로 오른쪽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몇 달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골프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으니 대략 반년쯤 되었을 것이다. 이 가게에서 우리는 다 함께 스크린 골프를 쳤다. 벽에 대고 공을 치는 연습만 주구장창 하다가, 큰맘 먹고 산 채를 들고 두어 번 스크린골프에 도전했었더랬다. 하지만 막상 타석에 들어서면 굳어버리는 몸과 처참한 실력에 좌절하고 심란해하고 있던 나에게 여사님은 자기만 믿으라며 데려오신 곳이 여기였다. 그 날 나는 여사님의 코치와 응원 속에 차츰차츰 공이 맞아가는 것을 경험했고 다시 희망을 얻었었다. 그때 참 재미있었는데 오늘은 선수가 아닌 갤러리이다. 아쉽다. 같이 재미있게 치고 싶다. 다시 연습 중이니 그런 날이 꼭 오리라. 소망을 현실로 만들 것을 다짐하며 문을 살며시 열었다.


어 왔나?
좀 늦었네?
택시가 잘 안 잡혀 가지고 늦었네요.
안 덥나?
모자는 벗어라.
아, 방사선 때문에 한쪽은 머리가 죄다 벗겨지고 또 한쪽은 이제 좀 나기 시작해가지고, 머리가 좀 많이 이상해요.
보여주기가 좀 그렇다고나 할까.
머, 우리끼리인데 어떠노.
그럴까요?


 방은 확실히 후끈후끈 했다. 승현이 형도 나기 형도 모두 반팔 티 차림을 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비니를 벗었다. 시원했다.


동완 쌤, 진짜 오랜만~


 자신의 차례를 마무리하고 온 여사님께서 뒤늦게 다가와 인사를 전했다. 자연스럽게 포옹을 하며 이야기하는 목소리에는 물기가 서려 있었다.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한 번 뽑아냈다. 승현이 형과 나기 형은 자주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여사님에게는 처음 들었을 법한 이야기들. 나는 해도 해도 안 질리지만 같은 이야기를 또 듣는 이에게는 고역이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생각했다. 어차피 이 사람들을 못 믿으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의 팬티도 널은 여사님, 지난 2년 간 온갖 징징거림을 받아준 이 형들 앞에서 무엇을 더 숨길 필요가 있을까? 이미 반쪽 머리도 공개했겠다 그냥 비하인드 스토리들도 모조리 쏟아내었다.



 한 타, 한 타 집중해서 치지 않으면 실수가 많이 나기에 다른 누군가가 칠 때는 조용히 해주는 게 골프의 기본 에티켓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거 없었다. 테이블에서는 계속 이야기가 진행되고, 자가 차례가 된 사람만 슬며시 빠져나와 치고 돌아오는 식이었다. 그러니 게임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고, 점차 기록은 처참해져갔다. 분명 내가 합류했을 때의 스코어는 굉장했었다. 10번 홀에 +1, +2, +5타. 대부분의 골프경기가 파72에 18홀까지 있음을 감안하면 수준급 성적이었는데 그게 싹 무너져 내린 것이다. 왠지 기뻤다. 그만큼 골프공보다 나에게 관심을 더 보였다는 것이니까.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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