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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29. 2017

[소설] 내려놓음 108 또 한 명의 어머니Ⅲ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08 또 한 명의 어머니Ⅲ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와 향한 곳은 삼겹살 집. 그 때와 같은 루트였다. 불판 가까이에 있으니 밀려드는 열기에 모자가 젖기 시작했다. 벗겨진 머리에 잔뜩 움츠러들어 있던 나였다. 외출할 때는 한참을 거울 앞에 서성이며 혹시나 이상한 점은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한 다음에야 집밖에 나섰다. 주위를 스치는 사람들 눈에 비니를 쓴 내 모습이 조금 신기하게 비칠지는 몰라도, 그저 몇 걸음 걷고 나면 잊혀지는 존재임을 알면서도 계속 마음에 걸렸다. 길가다가 어디서 웃음소리만 들려도 꼭 나를 비웃는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오르기 일쑤였으니 아주 그냥 자존감이 바닥을 뚫고 지구 반대편까지 들어갈 기세였다. 그래서 골프연습장에 들어가서도 꼬박꼬박 모자를 쓰고 있던 나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희한하게도 자연스럽게 모자가 벗어졌다. 고개만 돌려도 인상조차 남지 않을 사람들의 눈치가 웬 말이냐, 하며 여사님과 형들의 권유를 듣자마자 바로 벗어던졌다. 시원하고 상쾌했다.


 고기를 구우며 시작된 이야기의 화두는 단연 나의 회복 속도였다. 다들 병문안 갔을 때 보았던 나를 떠올리며, 지금 이렇게 눈앞에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조차 못했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일반적인 케이스와는 다른 길을 가는 내 모습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고 승현이 형은 말했다. 그 당시 그들이 상상했던 미래는, 바라마지않았던 미래는 지금의 나와는 확연히 달랐다. 훨씬 소박했다.



 정말 긴 시간이었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일상조차 적응되어 두려움마저 희석되어버릴 만큼 길었다. 논산훈련소에서 생각했었다. 이보다 더 시간이 느리게 흐를 수는 없을 거라고. 몸으로 하는 건 무엇 하나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없던 나에게 정말 힘든 시간이었기에 그리 생각한 거였는데, 이번 일에 비하면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벌어지는 일들은 또 얼마나 많던지 하나하나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경험하고, 정리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아니 우리 가족은 하루를 열흘처럼 보냈고 열흘 치 일을 하며 지냈다. 따라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고기를 구우며 이야기하고 웃는 건 전혀 기적이 아니었다. 충분히 때가 된 것일 뿐이라 여겼다. 그러나 밖에서 볼 때는 아닌 모양이었다. 나의 열흘 같던 하루가 그들에게는 그냥 하루였으니까.


 혹시 몰라 시작한 MRI 검사, 응급실 신세, 종양 판정 및 개두수술 결정, 수술, 중환자실 신세, 악성 판정, 교모세포종 사건, 화학 요법 및 방사선 치료와 그에 따른 부작용, 중이염 오해 사건, 그리고 오전에 있었던 경과 판정까지. 병역 면제 처분이나 이사 같은 사소한 에피소드를 제외한 중요 사건만 해도 열 토막이 넘는 일이 모두 2달 반 사이에 벌어진 것이다. 하나 흐트러질 때마다 시간이 지체되고 서너 개쯤 흐트러지는 건 예삿일인 이 길을 어떻게 삐끗함 하나 없이 걸어와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을 거라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며 그들은 이야기했다. 사실 삐끗함 하나 없었을 리가 있겠는가, 수없이 삐걱거리고 흔들거리고 그러면서도 앞으로 나아간 결과이지. 오늘 하루 별 이 없이 지나간 것에 얼마나 많은 감사를 드리며 잠들었던가. 기적은 따로 있지 않았다. 그 하루하루가 모인 게 바로 기적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고마웠다. 나를 아들처럼 아껴주시는 임 여사님, 삼촌이 조카 챙기듯 애정 섞인 툴툴거림으로 끌어주는 승현이 형, 어리버리해서 이 마음들을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하는 나를 위해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나기 형.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과 가장 힘들었던 시절 모두를 함께한 사람들이 이런 소중한 사람이고 지금 같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마웠다. 이런 인연을 맺어준 그 주체만 알 수 있다면 거기다 대고 수없이 절했으리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꼭 보답하고 싶다. 그리고 그 때 “내가 그 정도로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른 건 아니었어요!” 라고 숨겨왔던 항변을 전하고 싶다.




 3차도 역시 그때처럼 노래방이었다. 깜빡하고 저녁 약을 챙겨오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 정도쯤은 괜찮다는 승현이 형의 말에 불안감이 싹 가셨다. 결과도 좋게 나왔는데 까짓 거 오늘 하루쯤은 괜찮으리라.


 사실 나는 노래방에 가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엄밀히 말해 엄청 싫어한다. 종종 이야기했다. 내가 가기 싫어하는 장소 1위는 높은 곳, 2위는 물, 그리고 3위가 노래방이라고. 그렇다고 노래에 영 무관심한 것은 또 아니라서 가요를 들으며 곧잘 흥얼거리기를 즐기는 편이다. 그럼에도 노래방을 싫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못 부르기 때문이다. 음이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 좁은 음역대 탓에 무슨 노래를 불러도 타령이 되어버린다. 부르는 나도, 듣는 사람도 모두 부끄럽다. 그래서 노래방에 누가 마이크를 쥐어주면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기 일쑤였고, 타이밍 상 나에게 마이크가 넘어올 때다 싶으면 화장실로 도망가 숨어 있다가 조심스레 나타나곤 했다. 그렇지만 승현이 형과 나기 형이 함께 가는 노래방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좔이 형까지 포함해서 이 3명은 주변에 누가 결혼하면 축가 가수로 자주 초빙될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였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부르는 나의 노래도 그들과 함께라면 달랐다. 텅 빈 공간을 애드리브로 메꿔주고, 고음파트는 대신 불러주거나 가이드를 해주어 소심한 타령을 사람다운 노래로 바꾸어 놓는데 선수였다. 게다가 성량은 어찌나 풍부하던지 혼자 불러도 노래방이 콘서트장처럼 느껴지게 만들었고, 그 뒤에 숨어 같이 소리를 내질러도 티 하나 나지 않아 여러모로 좋았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노래를 따라 부르며 그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응어리들을 하나씩 떠내려 보냈다. 노래를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특히 마지막 남은 시간을 아까워하며 불렀던 이승환의 《천일 동안》과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는 정말 대단했다. 열창하는 두 형의 모습은 마치 감동적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오르게 했고, 급기야 노래방 기계의 가사 자막도 영화의 엔딩 크레딧으로 보이는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아 노래 연습해야겠다. 소리 막 지르고 싶어.’


 진한 여운을 남기며 그렇게 모임은 마무리되었다. 모두의 환송을 받으며 택시를 탔다.


동완아, 조심히 가고.
오늘 수고했다. 동완아. 또 보자.
쌤님. 조심히 가이소.
아저씨 성서쪽로 가주세요.
네.


 텅 빈 도로를 택시는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스크린골프장에서도 음식점에서도 그리고 노래방에서도, 이렇게 제 발로 걸어와 줘서 고맙다고 수없이 이야기하던 여사님, 같이 지낸 10달 동안 나를 품어 낳아준 또 하나의 어머니의 눈물을 뒤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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