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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31. 2017

[소설]내려놓음 109 화려한 외출Ⅰ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09 화려한 외출Ⅰ





 방사선 종양학과 선생님의 말씀대로 방사선 치료가 끝나자 온종일 구름 낀 것처럼 몽롱하던 정신이 맑아져가기 시작했고, 때때로 속이 미식거리던 증상도 차츰 사라져갔다.


 ‘역시 뇌부종 때문이었나 보네. 혹시나 mass(종양)가 많이 남아서 그런 건가 싶어 걱정했는데 아닌가보다.’


 그뿐이 아니었다. 방사선 치료와 함께 항암제 복용도 중단되었는데, 그 탓인지 잠도 깊게 들게 되어 아침에 일어나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 한동안은 불을 끈 채 눈을 감고 있어도 온갖 기하학적 무늬들이 나에게로 쏟아지는 환영이 보여 무슨 이유인지 궁금해 했었다. 약효가 발휘되면서 생기는 노이즈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Temodal을 먹지 않게 되자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의 가설이 맞지 않았나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환영은 마치 이(異)세계로 통하는 통로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대로 자고 일어나면, 아프기 전으로 또는 다 나은 이후의 세상으로 바뀌어져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환영은 허상인 법. 결국은 기대를 저버릴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낸 존재였기에, 환영(幻影)의 사라짐은 나에겐 환영(歡迎)이었다. 속도 좋고 정신도 맑고 잠도 잘 자게 되니 아침이 개운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고, 이전의 일상과 다른 바가 없어졌다. 머리가 반쪽이고, 운전은 아직 할 수 없으며, 의병 제대 처리가 되어 실직자가 된 것만 제외하면.



 컵에 물을 담아두고 몇 시간을 놔두어보면 어떻게 되어 있을까? 백이면 백 줄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증발했기 때문이다. 컵 안의 물 분자들이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한 뒤, 그 에너지로 분자 간의 인력을 끊고 공기 중으로 달아난 것이다. 자유 의지 하나 없는 물 분자조차 일정 수준 이상의 에너지를 보유하면 이렇게 컵 밖으로 탈출하고 마는 게 자연법칙이다. 하물며 인간인 나는 어떠했겠는가. 에너지가 충만해져갈수록 ‘탈home’을 꿈꾸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치료 내내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지난날의 지루함을 이를 더욱 가속시키기에 충분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원했던 ‘한의사’라는 꿈. 그 꿈을 향한 긴 여정의 첫걸음이던 첫 학기 첫 수업은 ‘한의학 개론’이었고, 그날 우리는 ‘음양(陰陽)’의 개념에 대해 배웠다. 심심풀이로 커리큘럼을 짜지 않는 이상 그 내용을 처음에 배치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한의학은 ~~이다.’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음양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음(陰), 양(陽)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음양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음성과 양성, 음지와 양지, 음각과 양각, 양수와 음수 등등 실생활에서 이미 많이 접하고 있어 직관적으로 그 의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기(熱氣)와 한기(寒氣), 밝음과 어두움, 고요와 소요, 내성적과 외향적, 물과 불 등의 제시어를 주면 대부분 음(陰)에는 ‘한기 – 어두움 – 고요 – 내성적 – 물’을, 양(陽)에는 ‘열기 – 밝음 – 소요 – 외향적 – 불’을 가져다 놓는다. 그리고 이게 100% 맞다.


 이러한 음양도 한 단계 더 나아가면 강도에 따라 4개나 6개로 분화되는데 4분할하면 태양(太陽), 소양(少陽), 태음(太陰), 소음(少陰)으로 나뉘며 6분할하면 여기에 양명(陽明)과 궐음(厥陰)이 추가가 된다. 사상체질을 이야기할 때 태음인이니 소양인이니 하는 용어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름에서 추측 가능하듯 태음과 소음은 음(陰), 태양과 소양은 양(陽)이며, 태양과 소양만을 놓고 비교하면 더 강한 양(陽)은 태양이다. 그래서 선현들은 태양은 ‘양극(陽極)’, 양(陽)이 융성한 상태로 소양은 ‘양시생(陽始生)’, 양(陽)이 비로소 생겨나는 상태라 설명한다. 따라서 여름은 태양의 계절이며 봄은 소양의 계절이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대개 시작시기에는 하고자 하는 의지와 욕구는 충만하되, 실상 살펴보면 이루어놓은 것도 힘도 없게 마련이다. ‘양(陽)’ 또한 마찬가지이다. 양(陽)이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하는 소양(少陽)은 강력한 의지에 비해 그 힘은 미약하다. 그래서 소양의 기운을 설명할 때 막 씨앗에서 움튼 싹, 터질 듯 말 듯한 꽃봉오리, 알에서 방금 깨어난 거북이가 살기 위해 바닷가로 달려가는 모습을 많이 예로 들곤 한다. 여기에 비추어 보았을 때, 지금 내 모습은 한 마디로 ‘소양(少陽)’이었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얼어붙었던 나에게 뒤늦게 찾아온 소양의 계절 ‘봄’. 소양답게 나가고자 하는 외출의 욕망이 하늘을 찌른다. 그러나 소양답게 힘은 또 모자라 욕망을 실천에 옮기기가 벅차다. 아직은 밖에 오래 있는 게 부담스럽다. 3달 가까이를 실내에서 주로 생활하다보니 사회에 적응할 시간이 좀 필요한 듯하다. 집 주위 공원을 산책하거나 도보 5분 거리 골프연습장에 연습하고 오는 정도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 간단한 걸 한 시간 지속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 공원을 거닐다가도 문득 시간이 좀 된 것 같은데, 하는 느낌이 들면 5분 내로 집에 도착해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다가 다른 장기들이 다치겠다 싶을 정도로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며 목을 옥죄어와 숨 쉬기조차 힘들게 하기 일쑤였으니까. 그 때문에 한동안은 집 밖에 나갔다하면 강박증처럼 시간을 수시로 확인하는 습관이 생기기까지 했다. 골프연습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일이 헤아려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공을 본 시간보다 시계를 쳐다 본 시간이 더 길었으리라. 건강 회복과 치유를 최우선시 해야 한다는 프로세스는 이처럼 매우 강력했다. 심지어는 민감하기까지 해서 별 거 아닌 것에도 즉각 대응에 나서는 일이 빈번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작금의 현실이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져 공포에 휩싸이곤 했었다.


 ‘끝이 오기는 할까? 그 끝이 내가 바라는 미래일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무엇이냐,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마음이라 답할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거나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역풍을 맞게 되더라도, 마음먹은 바를 관철시키고 마는 게 인간이니까. 나 또한 사람이기에 예외가 아니었다. 영원히 나를 지배할 것 같던 불안감도 외출을 열망하는 마음 앞에서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그 틈을 타 활동 시간과 영역을 조금씩 넓혀나갔고, 이제 새로운 걸 도전해도 되겠다 싶을 때 내가 선택한 건 동전노래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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