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집에서 골프연습장에 가던 길이었다. 여느 때처럼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근처에 있던 비둘기가 퍼드덕 대며 날아올랐다. 비대해진 탓에 사람들이 다가가도 재빨리 걸을 뿐이던 비둘기가 나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닭이 되어버린 비둘기, 그 짧은 비상의 끝은 아파트 상가 2층이었다. 툭하면 업종이 바뀌던 그곳은 이제 동전노래방이 되어있었다. 신기했다. 이 가게는 몇 달이나 갈까 궁금해 하며 상가 2층으로 올라갔다. 비어버린 지 꽤 된 듯 먼지가 소복이 쌓인 오른 편 가게를 뒤로 하고 왼 편의 동전노래방을 향했다. 오후 2시부터 밤 1시까지 영업한다는 내용이 적힌 A4 용지가 붙은 문을 살짝 밀어 내부를 살펴보니 텅 비어 있었다. 시간은 2시 반, 근처 중학교가 빨라야 3시에 마치니 당연했다. 신기한 건 주인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손님이 많을 때나 나타날 요량인 듯 가게 어디에도 주인은 없었다, 다만 입구의 CCTV만이 붉은 불빛을 깜빡거리고 있을 뿐. 수많은 좁은 방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방 기기의 기계음만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곳에 서서 나는 생각했다.
‘여기서 난 연습할 수 있겠구나. 나의 못난 노랫소리를 들을 이 하나 없는 여기만큼 더 적당한 곳은 없겠구나.’
가장 구석에 자리한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계에 1000원짜리 지폐를 밀어 넣었다. 난생 처음 스스로 노래방을 찾아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 동전노래방은 나의 외출코스 중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집 근처만 배회하던 외출도 계속되자 감질나기 시작했다. 어떤 사탕도 끝까지 녹여 먹어본 적이 없던 나였다. 어느 정도 크기가 줄어들면 좁아진 표면적에서 묻어 나오는 미소한 양의 단 맛에 참지 못하고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어야 직성이 풀렸다. 용기를 냈다. 부모님을 설득해 모임에 나갔다. 갔다 온 다음날에는 부모님 걱정에 장단 맞춰드리기 위해 몸을 사리는 시늉으로 외출을 건너뛰어야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500원짜리 2개보단 1000원짜리 하나가 더 좋았다.
모임의 대부분은 지난 2년을 함께한 공보의 형들과의 만남. 데면데면했던 초반을 제외한다면 1년 반 남짓 밖에 안 되었지만 그 어떤 사이보다 끈끈하다. 개업 준비로 정신없이 바쁘거나 해외여행 중인 형 같이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다 한 번씩은 보았다. 나기 형은 세 번 봤다. 그러나 민성이 형은 보지 못했다, 같이 대구에 있으면서도. 잘 되기로 소문난 치과에 취직한 형은 그 명성답게 쉴 틈 없이 일했고 주중에 한 번 있는 오프 때는 세미나로, 일요일에는 교회로 스케줄이 빡빡하게 차 있어 시간 낼 참이 없었다. 하루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자미 울타리 너머로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민성이 형이 생각났다. 괜찮은 복식조였던 우리. 생각난 김에 바로 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동완 : 형, 언제 시간 돼요?
민성 : 그 건 왜?
동완 : 그냥 머, 보고 싶으니까. 우리 한 번 봐야죠.
민성 : 그래, 그래. 한 번 시간 조정해볼게.느닷없이 왜 묻나 했네.
남자에게 보고 싶다는 표현은 역시 남사스럽다. 요즘 말마따나 손발이 다 오그라든다. 그래도 이렇게 강하게 압박해서 볼 수만 있다면 그 정도쯤이야. 압박은 성공했다. 형은 이리저리 일정을 조정하여 토요일 저녁 시간을 만들어 냈다. 시간이 남아도는 백수인 내가 형 집근처로 가겠다고 하며 약속 장소를 잡았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도 몇 명 올 수 있다고도 스치듯 말해두었다. 그때부터 물밑작업에 착수했다. 그날 시간이 될 법한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약속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며 나올 것을 부탁했다. 바쁜 생활에 치여 잊어버릴 수 있으니 약속 이틀 전에 다시 연락을 취해 확인도 시켜주었다. 다만 약속이 생길 수도 있어 못 나올 것 같다던 우민이는 제외했다. 술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애가 거절하면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우민 : 형, 그날은 안 될 수도 있어요. 약속이 생길 수도 있어서.
동완 : 여자구만? 그래 솔직히 고추들보다는 여자가 소중하지. 꼭 거기 가라. 저번에 보기도 했으니 괜찮아.
우민 : 그래도 약속이 안 생기면 그때는 꼭 갈게요.
동완 : 아니 오지 마. 완전 진심. 여자 만나는 게 더 중요함. 잘 돼서 나중에 다리 놔줘.
고대하던 약속 당일이 되었다. 하루 일과를 재빨리 마무리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때는 6월 초. 실상 여름이다. 허나 난 봄을 맞이한지 얼마 안 된 몸이 아니던가. 혹시 감기 걸릴지 몰라 얇은 재킷도 하나 챙기고 속을 달래 줄 과일과 함께 저녁 약도 미리 먹었다. 마지막으로 모자를 쓰고 거울 앞에서 별다른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생활 전반에서 묻어나오는 아픔의 흔적을 느끼며 집을 나섰다. 씁쓸했다.
집 근처 지하철역까지 걸어갔다. 막상 도착하니 교통카드가 없어 1회용 승차권을 구입했다. 잠시 기다린 뒤 탄 지하철. 빈 자리가 없었다. 노약자석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내가 앉을 자리가 아니었다. 비록 중병의 환자일지라도 발현 중인 큰 증상도 없고 사지도 멀쩡하니까, 사회의 배려를 받을 만큼 아프지도 않으니까. 애초에 차가 없을 때는 몰랐는데, 한동안 운전을 하다가 못하게 되니 대중교통이 여간 답답한 게 아니다. 환승까지 하고 있노라니 불편하기가 그지없다.
퇴원을 앞두고 한량처럼 병동을 휘적휘적 돌아다니다 회진 중이시던 교수님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어, 교수님.
아, 산책 중이셨구나. 어쩐지 병실에 없더라.
혈액검사 결과가 나온 건가요?
아뇨, 내일쯤 나올 거예요.
이거만 통과하면 퇴원에는 별 문제 없겠죠?
네, 그럴 거예요.
아, 교수님, 혹시 퇴원하고 나면 운전해도 되나요?
3개월 정도는 지켜봐야 해요. 그때까지 특이사항이 없으면 운전해도 돼요.
나의 병소는 좌측 측두엽이었고 그곳을 거의 다 들어내는 대수술이었다. 이때 측두엽 간질이 매우 잘 일어나기 때문에 항경련제를 꾸준히 먹고 있었다. 앞으로도 꾸준히 먹어야 하며 약으로써 조절이 잘 되는 지 관찰도 필요하다. 그 기간이 바로 3개월. 이제 남은 시한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다시 운전대를 잡을 수 있다.
‘다른 암이라면 이런 불편함은 없을 텐데. 그뿐일까? 방사선 치료도 머리에 안 받으니까 머리카락 빠질 일도 적고, 방사선 치료 부작용도 덜하고 얼마나 좋아. 하고많은 곳에서 하필 뇌종양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