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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31. 2017

[소설]내려놓음 111 화려한 외출Ⅲ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11 화려한 외출Ⅲ





 약속 시간에 조금 늦게 도착한 지하철역 출구에는 민성이 형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병실에서 보다가 밖에서 보니 더욱 반가웠다. 형이 예약해둔 음식점은 막창 집이었다. 꽤 맛집인 듯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민성이 형이 주문하는 사이 사람들에게 몰래 위치를 알렸다.


형 요즘 단체카톡방에 말도 없고, 많이 바쁜가 봐요?

말도 마. 아~ 월화수목금토 다 진료하고 정신없다. 퇴근하면 학원가는 것도 있고, 요즘 살쪄서 배드민턴 동호회도 나가고 있거든. 오늘 시간도 겨우 냈어.


어? 수요일은 오프 아니었어요?
아, 그렇기는 한데 오전에는 세미나 가고, 오후에는 치료 덜 된 환자 예약 잡고 진료할 때가 많아.
바쁘게 사네요. 전 완전 백수인데. 형 데이트 할 시간은 나요?
시간 내서 가끔 만나지. 오늘 너 아니었으면 여친 만났을 걸?
나도 연애하고 싶다. 근데 머 머리가 나야 하든 말든 하지. 돈도 없고.
일은 잘 되요?
여행 갔다 와서 까먹지는 않았고?
그걸 어떻게 까먹어.
근데 어제는 완전 빡쳐서 일 확 때려치울까 하다가 그냥 참았다.
왜요?
원장이 돈이라도 떼먹었어요?”
어 맞아. 분명 계약할 때는 세후 금액이었는데, 세금 좀 떼고 주더라.
어제가 첫 월급인데 완전 당황스럽더라고.
그래서요?”


 자초지종을 듣고 있는데, 뜬금없이 누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우민이었다.


어? 니 약속 있다 안 했나?
다 형들 보러 왔죠.
구리치지 말고. 약속은?
아, 그리 됐습니다. 아침에 연락했는데 걔가 아프다면서 미루면 안 되냐고 하더라구요.
애프터를?
아니요. 오늘 처음인데...
프로필 사진보고 맘에 안 들어 까인 거네. 끝났네, 끝났어.
저 이리 뵈도 인기 좀 있습니다만?
그냥 술이나 한 잔해


 뜻밖의 인물의 등장에 반갑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 기쁘다. 주말인데 지금까지 무얼 하다가 왔는지 묻자 승현이 형, 나기 형과 함께 스크린 골프를 치고 왔다며, 그 두 명도 곧 도착한다고 알려주었다. 계획대로였다. 화색이 도는 나와는 반대로 민성이 형의 얼굴에는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야! 이렇게 판이 클 거 같으면 미리 이야기했어야지.
그럼 시내에서 본다고 했을 텐데.
안 그래도 다래끼 생겨서 술 많이 못 먹어.
형을 위한 깜짝 이벤트입니다.
다들 형 보러 오는 거예요!
고맙죠?
근데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봐요.


 형의 원망을 피해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 사이 스크린골프를 마치고 온 승현이 형과 나기 형이 합류했다. 그리고 곧 반가운 얼굴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환자가 많아 못 올 것 같다던 지만이 형이었다. 2명이 순식간에 6명으로 불어났다. 막창 집은 너무 비좁았다. 대강 정리하고 맥주 바로 장소를 옮겼다.



 근황을 주고받았다. 치료 받는 동안 어떻게 지내었는지,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을 때마다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 그러다 화두가 민성이 형의 월급을 떼먹은 원장으로 넘어갔고, 그만 두고 싶다는 형의 의견에 다들 동의했다. 돈도 중요하지만, 사람과 사람간의 약속을 어기는 원장 밑에서 일하다 보면 상처받거나 피해보는 건 형 밖에 없다는 게 요지였다. 그 때 지만이 형이 말했다.


근데 어차피 민성이 니는 마음 약해서 못 지른다.
지르는 건 내 같은 놈이 되지, 니는 모한다.
지금 말은 그렇게 해도 막상 원장 보면 조심스럽게 ‘먼가 착오가 있으신 거 같은데...’ 하며 우물쭈물하다가, 또 일은 일대로 다하고. 그러고 있을 걸?
맞아요.
사실 오늘 확 지를까 하며 출근했는데 아직 원장은 안 왔고 환자는 있고.
환자는 아무 잘못 없으니까 또 치료하고.
치료하다 보니까 시간도 지나고 힘도 빠지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아. 니 같은 부원장 두고 싶다.
그나저나 나도 빨리 개원해야 하는데.


 이렇게 호기롭게 이야기하는 지만이 형에게 괜찮은 수가 있는가 했는데, 알고보니 형도 별반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자신도 부원장으로 근무 중이었고 심지어 그 한의원 원장과 마찰을 빚고 있었다. 형이 근무한 뒤 환자가 2배로 늘 만큼 환자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었지만 원장은 형을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그리고 원장의 아내까지 한의원에 나타나 간섭을 하는 통에, 형은 당초 계획보다 개원을 앞당기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아니, 아내까지 원장실에 와가지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훈계를 하는 거야.
원장 아내가 무슨 권리라고 그런 이야기를 해요?
또 지가 치료에 대해 무얼 안다고 그런 소리를?
아니, 그래 걔도 한의사 면허는 있어.
근데 올해 졸업해서 진료해본 적도 없으면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데, 남편이 또 원장이니까 머라 할 수도 없고.
형 마음고생이 심하겠네요.
원래 1~2년 있다가 내공 좀 쌓이면 개원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그냥 올해 할란다.
위험부담 상당할 텐데요.
에이 몰라. 같은 처지끼리 한 잔 하자.


 그러면서 둘은 쓴 잔을 들이켰다. 지만이 형의 개원 선언을 시작으로 대화 주제가 의과, 치과, 한의과의 개원 비용 및 수익, 개원의와 봉직의의 삶 차이로 넘어갔다. 많은 것이 변했음을 느꼈다. 자주 자주 만나서 밥도 먹고 술 마시기도 했던 우리였고, 그 당시 대화 주제는 대개 스포츠나 이성 교제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금 모임의 시발점이 된 배드민턴,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사람을 끌어 모으는 계기가 되었던 축구, 겨울에 같이 타러갔던 스키나 보드, 한 때 열광적으로 쳤던 볼링과 탁구, 같이 종종 관람하러 갔었던 야구 등 스포츠 이야기로 시작하여 한참을 떠들다가 밤이 깊으면 자연스레 이성 교제 이야기로 넘어갔다. 모두들 미혼이었으니까 수많은 가능성들로 넘쳐났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은 또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곤 했다. 그랬던 사람들이 이제 현실을 논하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절로 느껴진다.


 특히 남들보다 훨씬 긴 3개월을 보낸 나에겐 지난 시간들이 정말 까마득한 옛날 같다. 이제는 그때를 회상하면 기억에 마치 물안개가 낀 것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그런데 그 시간을 함께 보낸 이들이 지금 눈앞에 있으니, 현실이 현실 같지가 않고 꿈만 같다. 행복했던 그 시간을 뚝 잘라다 지금 펼쳐놓은 기분이다. 아픈 이후부터 감사하고 소중하지 않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래도 순위를 매기라고 한다면 지금을 1등으로 꼽고 싶다.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오늘 못 본 사람이 더욱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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