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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31. 2017

[소설]내려놓음 112 화려한 외출Ⅳ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12 화려한 외출Ⅳ




 3차는 일본식 선술집, 밤은 깊어가고 뱃속에 들어간 술은 많아지니 다시 옛날로 돌아가 ‘이성’이 주제가 되었다. 총각 일색이던 예전과는 달리, 그 사이 결혼한 사람이 둘, 곧 결혼할 사람이 둘이 생겼다. 그 덕에 자못 진중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경상도 상남자와 기 센 여자가 만드는 투닥투닥 전쟁 같은 신혼
 부드러운 남자와 부드러운 여자가 만드는 알콩달콩 평화로운 신혼


 상반된 두 신혼부부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왔다. 평범한 가정과 모범적인 가정을 비교해보는 맛이 쏠쏠했다. 얻는 것도 많았다. 결혼 준비 과정이나 결혼 생활에서의 주의할 점, 결혼 상대를 찾는 법 등에 관한 팁들이 쏟아졌다. 다른 한 쪽에는 우민이의 연애사로 흥했다. 공보의가 된 이후로 한 번도 여자친구가 없었지만 그는 화려한 삶을 살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다이너마이트 몸매의 여성이 계속 대시한다던가, 제주도 놀러갔을 때 같이 파티를 즐겼던 여자가 우민이를 애타게 찾아 물어물어 연락 온다던가. 에피소드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부럽다. 그리고 외롭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내가 너무도 초라하다. 듣는 이야기가 늘어날수록 더욱. 이 이야기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나. 이것들은 자신이 자신 이야기의 주인공일 때 의미가 있다. 지금 나는 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다. 암과 암으로부터 대항하는 나의 몸, 이 둘의 싸움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한낱 방관자일 뿐. 모든 게 덧없다. 집에 가고 싶다.


이미 일하고 있거나 개업 준비 중인 공보의 전역자
전역을 대비하여 향후 진로를 탐색중인 3년차 공보의
아직까지는 그럴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는 2년차 공보의
결혼을 했거나 결혼을 준비 중인 형
화려한 싱글 생활을 즐기고 있는 동생


 어디에도 내 자리는 없다. 나는 진로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지만 당장 ‘생존’이라는 당면한 과제를 해결해야 하며, 솔로이지만 집 밖에 나가는 것이 아직은 두려운 환자다. 저 모든 건 환자의 몫이 아니다. 몸 상태가 좋아 잊고 있었지만 나는 환자다. 그래서 술자리에서도 다들 소주와 맥주를 마실 때 나는 물과 사이다를 마시고 있다.

 ‘그래, 나 환자야, 젠장. 그래서 머, 나더러 어쩌라고.’


 아무런 일없이 시간이 흘렀다면 나도 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었을 것이다. 진로를 탐색하며 새로운 인연과 함께 앞으로의 미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 모든 게 꿈만 같다. 아까의 행복한 꿈은 온데간데없고 악몽만 남아있다. 아픈 나를 위해 이렇게 다들 두말없이 찾아와준 모임이건만, 그 속에서 질투와 외로움을 느끼는 나. 한심하다.

 ‘사람이란 다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냥 내가 미숙한 걸까.’



 뇌종양 발병 이후로 통금이 생겼다. 언제까지 들어와야 한다는 합의된 사항은 없지만 되도록 12시는 넘기지 않는다. 먼저 주무시면 좋을 텐데 꼭 안 자고 기다리는 어머니 때문이다. 출근해야 하는 어머니의 잠을 빼앗을 수 없기에 자정은 넘길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12시가 두려운 신데렐라가 따로 없네. 그래 맞아. 요정이 마련한 마차도 본질은 호박이듯이 지금 아픔을 못 느끼고 있어도 내가 환자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지. 아니다. 아니다. 나는 개구리 왕자처럼 저주를 받아 잠시 환자가 된 것이고 본질은 그냥 `나` 아닐까? 내가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몰라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모두의 이야기에 맞장구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속으로는 온갖 생각을 다 한다.

 ‘누가 딱 나타나서 저주를 풀어주면 좋겠다. 아침에 일어나서 `참 실감나는 꿈이었어.` 한 마디하고 출근하고 싶다.’



 3차도 끝이 났다. 백수가 돈이 어디 있냐며 말리는 형들을 뿌리치고 술값을 계산했다. 괜히 혼자 질투하고 원망했던 게 민망도 하고, 나를 위해 이렇게 찾아온 사람들이 고맙기도 하고, 그냥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사버렸다, 이 시간을, 누구도 빼앗지 못하게.


 아직 술을 더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4차는 노래방으로 정했다. 평소 패턴이면 아직 노래방 가기에는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고집 좀 피웠다. 집에 가기 전에 노래방에 꼭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까 느꼈던 소외감, 그동안 병과 싸우며 알게 모르게 쌓아온 응어리를 토해내고 싶었다. 병과 싸우지 않고 둥가둥가 놀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쌓인 게 좀 있었나보다. 그리고 요즘 빈 동전노래방에서 연습했던 성과를 평가받고 싶은 마음도 좀 있기도 하고.



 음역대가 무지 좁은 나에게는 랩이 만만하게 보였더랬다. 그래서 열심히 불렀고 성과가 좀 있었다. 플로우 따위 개나 줘버린 국어책 빨리 읽기에 불과했으나 그래도 다른 장르에 비해 ‘그렇게 거슬리지 않다’까지는 올라와보였고 그걸 보여주고 싶었다. 예전의 처참함은 이제는 없다고, 그리고 힘든 상황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이를 주변 사람에게 인정받음으로써 동시에 나 스스로에게도 인정받고 싶었다.

 박효신의 《야생화》, 이승환의 《천일 동안》, 나얼의 《바람 기억》, 버즈의 《가시》, 애덤 리바인의 《Lost star》 등등 수많은 명곡 사이에 뻔뻔한 음치 래퍼의 국어책 속독이 간간히 삽입된다. 어차피 내가 노래 못 부르는 거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다. 예전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 더 듣기 안 좋다는 것은 애저녁에 깨달은 뒤다. 많이 늘었다는 칭찬에 취해, 또 분위기에 취해 점점 목소리가 커진다. 신난다.


 몇 번의 추가 시간을 다 쓰고 남은 시간 1분, 마지막 곡은 《하나 되어》 였다. 넋 놓고 박수치는 나에게 마이크가 쥐어졌다.

형, 저 이거 몰라요.
어디서 많이 들어봤을 거다. 한 번 해봐. 일단 우리들이 먼저 불러볼게.

 승현이 형이 다른 마이크를 잡고 리드하면 다 같이 따라불렀다. 처음 듣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예전에는 멜로디만 들렸던 노래가, 그 노래의 가사가 하나하나 날아와 마음에 꽂힌다. 마이크를 쥔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나도 같이 따라 불렀다, 잘 모르면서 분위기에 취해 큰 소리로.



우린 해낼 수 있어.
다시 일어날 수 있어.
그토록 힘들었던 지난 시련도
우린 하나 되어 이겼어.


 건너편에 앉은 지만이 형이 눈짓했다. 날 위한 노래라고. 이미 느끼고 있었다. 뭉클하다. 무언가 안에서 벅차오른다. 셔츠가 부풀어 올라 터질 것 같다. 노래방 시간과 함께 노래가 끝나고 모두가 일어난 방. 무얼 놓아둔 걸 찾는 것처럼 둘러대고 잠시 남아 여운을 느껴본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흘리지 않으리라. 흘리면 이 기억도, 감동도 흘려버릴 것 같으니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노래방에서 나와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택시를 탔다. 시간은 1시 반. 걱정하고 있을 부모님에게 얼른 연락을 드렸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을 찬찬히 다시 생각했다. 더 많이 더 자세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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