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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31. 2017

[소설]내려놓음 113 1cycleⅠ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13 1cycle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 사이 힘든 고비를 넘었음을 축하하는 많은 사람들과 모임도 갖고, 식사도 하고, 마지막으로 받은 월급과 퇴직금을 은(銀)에 투자도 해보았다. 매주 일요일에는 빠지지 않고 성당 교리반에 나가고, 골프연습장과 동전노래방에도 매일 출근하는 등 백수 과로사 한다는 말처럼 별 시덥지 않은 일들로 하루를 채웠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넘치는 감수성을 주체하지 못하던 시기도 있었다. 다시 마주한 바깥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온 세상에 자리한 모든 게 귀엽고 앙증맞았으며 벌어지는 일 하나하나가 재미나고 즐거웠다. 성당 가는 길가에 핀 장미는 멀리서 보아도 향기가 났고 아들다운 음악 선율이 되어 다가왔다. 그냥 모든 자극들이 나에겐 한 편의 시가. 또는 한 폭의 수채화가 되는 시간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승현이 형은 누가 신경과 의사 아니랄까봐 간진 부분 발작 증세를 의심하며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수술 전 숱하게 경험한 그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그게 불시에 나타났다 금방 사라지는 불쾌한 낯선 경험이었다면, 이건 내 머릿속에 잠재되어 있던 옛 기억을 불러내어 찬찬히 음미하는 상쾌하고 익숙한 경험이었다. 내 옆을 스쳐 뛰어가는 어린 아이를 보며 짝꿍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고 도망가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는, 그런 거였다.


 문제가 하나 있기는 했다. 그 증상이 최고조로 달하는 시기가 불 끄고 자리에 누운 뒤부터 잠들기 직전의 10여 분이었다는 것. 자고 일어나면,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리는 터라 여러 수단을 통해 기록으로 남겨보려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침대에서 일어나 형광등을 켜는 순간 환한 햇빛에 가려진 별빛처럼 내 꼬마전구도 빛을 잃어버리기 일쑤였고, 그냥 어둠 속에 머무른 채 펜을 집어 들어도 막상 쓰려하면 써지지 않았다. 머리는 무어라 마구 떠들어대는데 써지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보이스 레코더를 주문했는데 불행히도 그게 도착하기 전에 그 시기는 지나가버렸다. 그때 그 생각들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다면 글이 더 쉽게 써졌을 텐데 좀 아쉽다.


‘왕필 曰, 언어(言語) → 상(象 image) → 의미(意)’



 예과 2학년, 생리학 첫 강의 때 교수님은 자신을 소개한 뒤 칠판에 저렇게 적었다. 그리고  『장자』의 외물(外物)편의 한 구절을 소개했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다.  (筌者所以在魚)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버려야 한다.  (得魚而忘筌)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이다. (蹄者所以在兎)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를 버려야 한다.  (得兎而忘蹄)

언어는 뜻을 전하기 위함이다.  (言者所以在意)

뜻을 잡으면 언어를 버려야 한다.  (得意而忘言)

나는 언제 말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을 만나 (吾安得夫忘言之人)

더불어 말을 해볼 수 있을 것인가. (而與之言哉)


 ‘득어망전(得魚忘筌)’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는 이 구절은 공부에 있어 매우 큰 의미가 있으며, 불경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교수님은 특히 ‘언어는 뜻을 전하기 위함이다.’ 부분을 강조하며, ‘의미를 가져오기 위해 상(象)을 가져오며 상(象)을 가져오기 위해 우리는 언어를 사용한다.’ 라는 설명을 덧붙이셨다. 그리고는 의미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 본 강의는 상(象), 즉 이미지를 많이 활용하여 진행할 것이며, 필요에 따라서 시험지에 그림을 그려서 답안지로 작성해도 무방하다는 말로 강의 소개를 마치셨다.


 이 기억에 비추어볼 때 그 상황은, 내 생각(意)을 타인에게 전달 가능한 방식으로 변환 시킬 능력이 한계에 봉착했기에 발생한 것이라는 보는 게 타당할 듯싶다. 이미지조차 두루뭉술하게 느껴진 걸 생각해보면 상(象)으로도 만들지 못한 것이니 언어로 표현하는 게 가능했을 리가 없다. 아마 어린 시절 짝꿍의 머리끄덩이를 슬쩍 잡아당기고 도망갔던 것도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감정이 무엇인지도, 표현할 방법도 몰라서 그랬으리라. 그리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쓰다가 답답한 마음에 휘갈겨 버린 낙서가 한가득한 노트, 방바닥에 널브러진 찢어진 종이쪼가리가 이를 증명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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