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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31. 2017

[소설]내려놓음 114 1cycleⅡ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14 1cycleⅡ





 그렇게 시간은 흘러 6월 10일을 향해갔다. 그 날은 4주간의 휴약기간이 끝나고 처음으로 Temodal을 다시 먹는 1cycle의 첫 날이었다. 방사선 치료와 병행할 때는 저용량이 투여되었지만 이번부터는 고용량을 복용하게 된다.


1cycle은 320mg

2~6cycle은 450mg


 예상 치료 종료일은 6cycle이 끝나는 11월 초, 남은 다섯 달을 향한 긴 여정의 첫 발걸음이다. Temodal을 처음 먹던 날이 떠오른다. 그 날은 구토했지만 그 이후로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양으로는 토하는 사람 없다던 PA간호사와 승현이 형의 말에 힘입고, 침구 치료를 비롯한 여러 방법을 통해 회피했다. 하지만 320mg은 처음이다. 저번과는 다르게 토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승현이 형의 말이 마음이 걸린다.


 그 말이 문제였다. 정확히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내 멘탈의 문제. 방사선 치료와 화학요법이 한창 진행되던 초기, 아마 나의 남성성을 가지고 심각한 고민을 하던 그 시기 전후 쯤, 나는 『내가 비록 암에 걸렸지만』을 정리하다가 항암제 복용 첫 날 내가 구토한 이유의 실마리를 찾았다.



전제가 믿음이 될 수 있다 – 짐의 이야기


 짐은 암이 여러 장기로 퍼진 상태였다. 한 차례의 화학요법을 받은 후 다시 의사를 찾아갔을 때 의사로부터 “매우 운이 좋다면 7월까지는 화학요법을 받지 않아도 될 겁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7월까지는 석 달이 남아 있었다.

짐은 그 말을 뭐라고 받아들였을까? 신경언어프로그래밍(NLP) 용어로 우리는 이를 전제라고 한다. 의사의 발언은 짐에게 화학요법이 더 필요하다는 말을 전제하고 있고, 이는 또한 종양이 다시 자라기 시작할 것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이런 생각들과 불가피한 상황에 대한 짐작 때문에 짐은 깊은 우울함의 구렁텅이에 빠졌고 그 시점에서 치료를 포기했다.

 …

 그 말이 짐의 믿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 말에 대항할 만한 더 강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을 받아들인 것이다.



 첫 날, 교수님은 약 먹고 2~3시간 이내에 토하면 약 기운을 토한 것이기 때문에, 그 경우 약을 다시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교수님의 이 말씀은 나에게는 Temodal을 먹으면 2~3시간 이내에 토할 확률이 높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고, 그 말이 나의 믿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 말에 대항할 만한 더 강한 믿음이 없어 나는 구토했다. 그리고 다음날 PA간호사와 승현이 형이 그 정도의 양으로는 토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말로 더 강한 믿음을 심어주었고 난 구토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계속. 그러나 형은 이번에는 조심하라고 했고, 320mg에 대한 경험이 없는 나에게 그 말을 이길 더 강한 믿음의 근거가 없다. 다가올 밤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예감한다.



 지난 날 다짐했었다, 다음 번 약을 먹을 때는 정성을 다하여 먹겠다고 말이다. 항암제를 먹는 날의 주인공은 밤 11시 알루미늄으로 코팅된 약 봉지를 잘라 입 안에 털어놓고 물과 함께 삼키는 순간이다. 하루는 그 1분여의 시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Temodal은 공복 상태에서 먹는 것이 핵심. 따라서 11시에는 빈 속이어야 한다. 저녁 식사를 평소보다 빠른 6시 반에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위주로 꼭꼭 씹어 먹는다, 입 안에서 다 소화시킨다는 마음으로. 섬유질이 풍부하고 건강에 좋은 채소반찬, 디저트로 먹는 과일류는 먹지 않는다. 소화가 늦어져 공복 상태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30분 정도 쉰 뒤, 1시간 운동해준다. 소화를 도움과 동시에 몸을 피곤하게 하여 잠이 잘 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땀을 흘리고 나면 샤워를 하고 가장 청결한 상태에서 침구치료를 실시한다. 침구 금기증 중에는 ‘대한(大汗)’, 땀을 많이 흘린 다음 침 치료를 금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 정도는 허용 범위 안짝이다.


 그 외에도 항암제 먹는 시간에 맞추어 하루 4번 야채수 먹는 시간도 조금씩 앞당겼으며, 체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골프연습도 1시간만하고 노래연습과 글쓰기는 건너뛰었다. 가끔 잤던 낮잠은 밤잠에 방해될까 싶어 참았고, 대신 화학요법으로 면역력이 떨어질 것을 대비하여 생강계피차를 틈틈이 마셨다. 생강은 구토(嘔吐)의 성약(聖藥)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구토에 효과적이어서 많이 마셔두었다. 그리고 자극의 잔상들이 밤잠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늘 보던 드라마도 보지 않았다. 


 밤 11시의 영향력은 비단 나 하나에 그치지 않았다. 내 방은 방문을 열면 바로 왼편에는 현관문이, 살짝 비켜 마주보는 곳에는 화장실이 있는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늦게 들어와 현관문을 열거나, 화장을 지우기 위해 화장실을 드나들게 되면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픈 이후로 부모님 걱정에 항상 문을 열어두고 자고 있는 실정인데, 여기에 생활 소음까지 더해지면 심히 곤란했다. 그 탓에 동생은 친구를 만나도 10시 이전에 들어와야 했고, 평소에는 12시 부근에 하루를 마무리하시는 부모님도 화학요법 기간에는 11시로 시간을 앞당기셨다. 온가족은 그렇게 11시의 위력 앞에 벌벌 떨었다.


 자기 직전, 항구토제도 챙겼다. 160mg 먹을 때 구토 한 번 없던 터라 굳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교수님께, 혹시 모르니까 처방해달라고 졸라서 받아둔 게 있었다. 울렁거림이 심해서 못 견디겠다 싶을 때 바로 먹을 수 있도록 머리맡에 물과 함께 준비해두고, 구토하는 상황을 대비한 큰 대야도 적당한 위치에 하나 놔두었다. 그동안 자기 전에 독서로 마음을 다스리던 터라 침대 근처에 책들이 많았다. 모두 책상 위에 옮겼다. 마지막으로 속을 편하게 하기 위한 꿀물 한 잔을 마시면서 마음을 다스릴 겸 EFT를 실시했다.


 ‘이제 부정적인 요소들이 제거된 것 같네. 이제 먹자.’


 처음 그 날과는 마음가짐이 다름에 안도한다. 그래도 두려운 것이 조금 남아있기는 하지만, 사로잡히지 않았으면 되었다. 그냥 저번보다 허들이 좀 높아졌을 뿐이다, 넘었던 그 것 좀만 더 높이만 뛰면 된다, 문제없다, 그동안 난 강해졌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이며 약을 삼키고 누웠다. 누운 내 발 위로는 절에 다니시는 어머니께서 오래전에 받아온 동자승 그림이, 머리맡에는 내가 교리반에 등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연주 형이 기념으로 준 십자고상이 보인다. 그리고 내 손에 주교님의 축성을 받은 묵주가 쥐어져있다. 무언가 있을 것 같은 분들의 힘이란 힘은 다 모았다. 성스럽기 그지없는 나의 잠자리.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른 밤이 찾아왔다. 그 때 내가 남긴 기록으로 상황을 갈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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