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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31. 2017

[소설]내려놓음 115 1cycleⅢ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15 1cycle Ⅲ





 하지만 기대와는 다른 밤이 찾아왔다. 그 때 내가 남긴 기록으로 상황을 갈음해본다.



 약은 아직 캡슐이 싸여 뱃속에서 머물고 있을 뿐인데 잠이 오지 않는다. 약효가 발휘되기 전에 잠들고 싶은데 좀처럼 쉽지 않다. 생각과 생각하는 꿈의 불분명한 경계선. 한 달 만에 다시 돌아온 이 지점. 오고 싶지 않았는데... 김유신은 말목이라도 잘랐는데 난 없구나.


 얇은 이불을 덮었는데도 너무 덥다. 잠옷 바지를 걷어보기도 하고, 이불을 반으로 접어 배만 덮어 봐도 소용없다. 내 몸은 그냥 침대에 누워있는데 땅이 출렁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이 아래위로 요동친다. 뱃멀미가 이런 건가. 자세를 바꿔 누워도 별반 달라지는 게 없다.


 20분 째 흔들리는 침대에 누워있으니 토할 것 같다. 아직 12시. 약 먹은 지 1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 교수님이 약 먹고 3시간 이내에 토한 것이라면 약을 토한 것이니 다시 먹어야 한다고 한 적이 있다. 안 된다. 참아야 한다.


 ‘나는 비록 구역감을 심하게 느끼고 있지만, 그런 나 자신을 깊이 그리고 완전히 사랑하고 받아들입니다.’ 를 외치며 중요 혈자리를 두드리는 EFT를 사용해본다. 당신의 시험이라 여기고 잘 이겨내겠노라고 기도도 드려본다. 하지만 버겁다. 혼자의 힘으로는 버티기 힘들다. 결국 아껴두었던 항구토제... 침대 옆을 더듬어 찾아낸 약봉지를 뜯어 한 알 까서 먹는다. 물 한 모금과 함께. 이게 가장 큰 실수였다.

 울렁거릴 때 무엇을 먹는다, 마신다는 것은 자살행위. 저번에 그래서 토해놓고 또 깜빡했다. 미친 듯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누워서는 감당할 자신이 없다.


앉았다. 심호흡을 해본다. 좀 낫다. 아니 안 낫다.

불을 켜본다. 좀 낫다. 아니 안 낫다.

일어섰다. 심호흡을 해본다. 좀 낫다. 아니 안 낫다.


 12시 48분. 1시간 48분 지났다. 그래 잠 잘 생각하지 말고 3시간을 버티자. 책 한 권 집어 들었다. 눈에 안 들어온다. 생각했다.

 ‘차라리 이 시간을 기록으로 남기자.’


 이렇게 머리는 토하는 것에 강렬히 저항하는데, 몸은 이미 운명에 체념한 것 같다. 입에서 침이 쏟아진다. 다가올 일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눈물 젖은 편지도 아니고 침 흘린 종이에 남기는 기록이라니 웃긴다. 나의 저항은 혼자만의 싸움으로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온 가족을 다 깨우고 말았다.


 힘드니까 그럭저럭 잘 써진다. 쓰니까 시간도 흐르고 좋다. 이대로 빨리 2시가 왔으면 좋겠다.


 패했다. 1시 12분, 약 먹은 지 2시간 20분이다.

 꼬부기의 물대포도 이보다 세지 못하리라. 기록은 승전보가 아닌 패배의 기록이 되었다. 아쉽다. 하지만 오늘 이 패배는 내일의 승리를 위한 발판이 되리라. 내일은 항구토제를 같이 먹어야겠다. 한바탕 토하니까 속도 좀 낫다. 괜찮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다. 



 가슴속과 뱃속의 안정을 좀 찾을 때까지 글을 쓰고 다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이내 밀려오는 토기(吐氣). 괴롭지만 기쁘기도 했다. 지금의 울렁거림은 내가 약 기운을 다 토해내지 않음을 방증하는 것이니까. 패했지만 석패(惜敗), 참패(慘敗)가 아니었다. 1시간 넘게 참은 보람이 있음에 감사했다. 다시 찾아온 구토의 기세는 맹렬했다. 나올 것이 없어 신물만 토하더니, 신물은 이내 짠물로 바뀌었다. 순간 전해질의 불균형으로 인한 여러 증상이 떠올랐다. 미리 챙겨둔 물을 마시며 생각했다.


 ‘쓴물도 아니고, 짠물이 왜 나오지? 내일 형석이 형에게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온 음료를 놔두는 게 낫겠다. 항구토제도 같이 먹어두고. 좀 힘들다. 그래도 교수님께 졸라서 처방 받기를 잘했네. 안 그랬으면 진짜 많이 고생했겠다.’



 자다가 토하고 자다가 토하고 그러는 사이 날이 점점 밝아왔고, 대야에 가득 찬 지난밤의 흔적에 비친 햇살을 보며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아침과 함께 찾아온 평화 속에서 밤새 이루지 못한 잠을 채우고 일어난 시간은 11시 부근, 깔끔히 치워져 있는 주변과 정리된 이부자리에서 부모님의 손길을 느끼며 체중계에 올라섰다. 약 먹기 직전보다 1.5kg 줄어있었다. 보통 자고 일어났을 때 500g 정도 줄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약 1kg을 토한 셈. 참으로 힘든 밤이었다. 생각했다.


 ‘이제 모든 윤곽이 드러났어. 4주마다 5일씩, 그 것도 12시간만 힘들면 된다.’


 그러나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니, 기분 좋게. 둘째 날은 첫 날보다 상황이 훨씬 나았고, 셋째 날부터는 160mg 먹던 시절과 비슷한 정도의 경미한 부작용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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