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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31. 2017

[소설]내려놓음 117 2cycleⅡ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17 2cycleⅡ






 좔이 형이 결혼하고 이틀 뒤이자 첫 사이클 진행하고 3주가 흐른 시점인 7월 4일 월요일은 교수님과의 면담이 있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외래 채혈실에서 피를 뽑고 신경외과 진료실 앞에서 교수님을 기다렸다. 대기실 게시판에는 여러 선생님들의 외래 시간과 전문 분과 과목이 적혀 있었다. 교수님 이름 뒤에 적혀있는 ‘뇌종양’. 머릿속에서 저 세 글자를 다 지우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마음이 무겁다.


 1시간의 기다림 끝에 교수님을 만났다. 가방에서 궁금한 것을 정리해둔 노트를 꺼내 보여드렸다. 하루의 대략적인 스케줄이 어따ᅠ갛게 되는지 설명드리며 문제가 없는지, 바꿔야하면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할지 자문을 구했다. 교수님은 골프 연습 1~2시간, 노래 연습 1시간, 자전거 2~3시간, 글쓰기 및 책읽기로 채워진 하루 일정에 대해 모두 괜찮다고 하며 이대로만 살면 금방 나을 거라 대답했다. 부모님은 가이드라인에서 금지했다며 반대했던 ‘회 문제’ 도 여쭈어보았다.


교수님, 그러면 회나 육회도 먹어도 되나요?
방사선 치료 시작할 때 면역력 저하의 우려로 권고사항으로 먹지 말라고 적혀있었거든요.
그래서 지금껏 못 먹고 있는데, 방사선 치료도 끝난 지도 한참 되었고 하니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가지구요.
먹어도 괜찮아요. 다 먹어도 됩니다.
아, 그럼 혹시 술도 조금은 괜찮나요?
아뇨, 술은 안 돼요.
조금도?
먹는 약이 있으니까, 적어도 이거 끊을 때까지는 안 돼요.
그리고 술을 바로 뇌에 영향을 미치는 약물이니까 되도록 주욱 피했으면 좋겠네요.
네... 그리고 얼마 전에 운전 다시 시작했어요. 3달 지났으니까 괜찮죠?
약 먹은 뒤로, 별 이렇다 할 증상을 보이지는 않죠?
네. 수술 전에 종종 느꼈던 그런 것들은 치료 후부터는 한 번도 없었어요.
사실 운전도 근처 성당에 갈 때나 10분 할까 말까인데, 그것도 어머니는 많이 걱정하시네요.
아, 그리고 장거리 운전도 크게 문제가 있거나 그러지는 않죠?
운전하다 힘들거나 그러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거는 없죠.
그리고 본인이 의사니까 알아서 다 잘하겠죠.
그러면 친구랑 1박 2일 같이 여행가도 별 상관없겠네요?
약만 잘 챙겨먹으면?
물론이죠. 걱정이 꽤 많네요.
제가 아니라 저희 부모님이.
이렇게 교수님이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면 제 말은 잘 안 믿어요.
명색이 그래도 제가 의사인데.
모든 부모님들이 다 그렇죠. 이해해드려야 하는 부분이고.


 약 먹고 불편한 점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첫날은 2시간 반 만에 토했고, 그 후로는 항구토제와 같이 먹었으며 그럭저럭 잘 버텼다는 이야기도 했다.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신 교수님은 처방전에 항구토제를 추가했고, 수고했다며 다음번에 찾아올 날짜를 지정해주셨다. 그리고 일어나려는 찰나 잊고 있었던 중요한 이야기가 기억났다.


아, 교수님. 제 뇌종양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정확하게 무엇이 원인이라고 밝혀진 것은 없어요.
그러면 저는 가족력이 문제이겠네요.
아뇨. 스트레스고 가족력이고 모두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는 무관하다고 나와 있어요.
그러면...
그냥 운이에요. 운.
아, 네... 감사합니다.


 외할머니의 뇌종양과 나의 뇌종양. 이 두 가지 사실은 어머니와 내동생, 그리고 미래의 자녀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편두통이 심한 어머니와 엄살이 심해 조금만 마음이 안 맞아도 어지럽고 토할 것 같다며 시위하는 동생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뒤숭숭하여 밤잠을 설치기도 했더랬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그 일로 집이 뒤집어 지기도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수님의 ‘모든 것은 운에 달렸다.’는 말 한 마디는 한 줄기 빛이 되었다.

 ‘내 자녀에게는 영향이 가지 않구나. 다행이다 정말.’



 4일 뒤 금요일. 항암 2cycle이 시작되었다. 사실 병원에서 제시했던 치료계획표 상으로는 3일 뒤 월요일이 시작일이었다. 그래서 지난 1cycle 때도 월요일이 첫 날이었다. 그러나 2cycle부터는 금요일에 일정이 시작된다. 약을 먹는 5일 내내 자식걱정으로 밤잠을 못 이루시는 부모님, 특히 화수목금 내내 졸린 눈으로 출근하시는 어머니를 보니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아 교수님께 금요일부터 시작해도 되는지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조정해주신 덕분이다. 금요일부터 약을 먹으면 어머니 출근에 방해되는 날은 ‘월화수’ 뿐이고, 게다가 그 3일은 화학요법 후반부이기도 해서 부작용이 상대적으로 덜한 날이라 여러모로 마음도 편하고 좋았다.


 1cycle 때, 더 나아가 치료 초기에 가졌던 마음가짐을 되새기며 밤 11시에 있을 의식(儀式)을 위한 모든 절차를 차례차례 해나갔다. 깔끔하게 비워둔 침대주변과 청결한 몸과 마음가짐, 한방 차(茶) 요법, EFT까지, 이제는 먹어도 된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가다듬고 가다듬은 뒤 흰 알루미늄 약 봉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부정 탄다며 다른 용도로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하던 약 가위로 하나하나 잘랐다. 100mg 3봉지와 20mg 1봉지였던 지난번과는 달리 250mg 1봉지와 100mg 2봉지로 구성된 이번 cycle. 처음으로 본 250mg 캡슐은 거대했다. 4알이던 약이 3알로 줄었음에도 양이 늘어났음을 확연히 느끼게 해주었다. 눈앞에 깜깜했다.


 공보의 1년차 겨울, 형들과 함께 난생 처음으로 스키장에 갔었다. 일일 스키강사를 자처한 승현이 형은 나처럼 처음 타는 사람들이 많은 초보자용 슬로프는 돌발 상황 시 서로 대처가 잘 안 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며, 중급자 코스로 나를 데리고 올라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렇구나 하며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형 뒤를 어기적어기적 따라갔다. 그렇게 도착한 슬로프에서 난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다 넘어졌다. 그때 찍었던 사진을 보면 그 슬로프는 분명 경치 좋은 풍경에 둘러싸인 새하얀 눈 소복한 얕은 비탈길이었는데, 그 당시 내 눈엔 그게 아니었다. 깜깜한 절벽이었고, 여기를 내려간다는 건 내가 낼 수 있는 용기 밖의 문제였다. 모든 걸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었다.


 250mg의 거대한 흰 알약에서 난 그날의 스키장을 보았다. 스키장이 조그맣게 압축되어, 그러나 무게는 유지한 채 지금 내 손 위에 얹어져 있음을 실감한다. 언제까지고 위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기에 결국 첫 발을 내딛었던 그때처럼, 상황이 주는 압박감에 떠밀려 약을 삼켰다.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얼마 가지 못하고 눈 속에 엎어졌던 그날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서 일어나야 했다.


 1cycle 때와 같이 그 시간을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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