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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31. 2017

[소설]내려놓음 119 3cycleⅠ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19 3cycleⅠ






 2cycle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생이 된 동생과 고등학교 선생님인 어머니에게 차례로 방학이 찾아왔다. 그 덕에 아침마다 일어나던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으나 오히려 그것은 전선의 확대라는 결말을 가져왔다. 온가족이 24시간 내내 집 안에 모여 있게 되자 주말에나 가끔씩 벌어지던 게릴라전에 평일, 휴일 구분 없이 터져 나왔고 심할 때는 하루에 두 번 넘게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1994년 이후 최악의 폭염이라는 기상이변은 가족들의 전투력을 한층 높이는 결과를 가져와 상황을 더욱 더 악화시켰다. 넘치는 에너지를 외부로 돌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른다는 어머니의 말씀도 있어 가족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큰 결심이었다. 나들이 수준을 넘어 외박이 낀 가족 여행은 정말 머리털 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 이야기가 오갔던 곳은 제주도였다. 그러나 지지부진했다. 비행기를 타야하는 여행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던 부모님은 동생과 나에게 모든 계획을 일임했다. 허나 예산의 범위도 정해주지 않았고, 가능한 시기도 너무 유동적이었다. 그래서 ‘일정이 어긋날 경우 비행기 취소하기도 힘들고 다시 표를 구하기도 쉽지 않으며 숙소 예약에도 문제가 생긴다. 제주도에는 여러 종류의 숙박시설이 있고 가격도 천차만별이므로 예산 규모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혀야 예약할 수 있다.’라 설명하며 예산과 시기를 확실히 해줄 것을 부탁드렸다. 그러나 부모님에게서 돌아온 답은 ‘모른다.’ 뿐이었다. 답답했다. 이전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면 대략적인 예산 규모를 통밥으로 때려 맞춰보기라도 하겠는데 기준 잡을 경험조차 없으니 도무지 계획을 짤 수가 없었다. 그동안 가족끼리 여행 간 경험이 너무나 없었음을 실감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편도 1시간이 넘는 거리를 몇십 년째 매일 출퇴근하는 어머니에게 주말은 온종일 침대에 누워 체력을 보충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암에 걸리신 이후 주로 집안일을 담당하시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암 투병 이전에는 휴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쉬는 날 없이 공부에 매진하는 학생이 있으면 그들을 가르칠 누군가가 필요하단 걸 몰랐던 어린 시절, 못마땅하고 이해가 안 되었던 직업. 아버지의 직업은 학원선생님이셨다. 학교가 끝나야 학원이 시작되니 학교선생님인 어머니와 학원선생님인 아버지의 생활패턴은 정반대일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 두 분 모두와 밥을 같이 먹는 시간은 오직 일요일 아침과 저녁 뿐. 잔병치레가 많았던 나를 번갈아 케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조합이었지만, 어린 나에겐 전혀 와 닿지 않았더랬다.


 내가 수능을 치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 동생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나의 중고등 6년과 동생의 중고등 6년은 전혀 겹치는 기간 없이 존재했고, 그래서 부모님은 2002년 3월부터 2016년 2월까지 만 14년 동안을 수험생의 학부모로서 지내야했다. 그 와중에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는지 말하자면 끝이 없다. 그래도 그럭저럭 다 해결하고 마지막으로 동생 대학 입학까지 시켜 한숨 돌리겠다 싶었던 그날, 나는 동네 신경과 병원에서 MRI를 찍고 진료의뢰서 한 장 받아들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나의 잔병치레가 끝나니 동생의 잔병치레가 시작되고, 동생의 잔병치레가 끝나니 나의 수험생활이 시작되고, 나의 수험생활이 끝나니 동생의 수험생활이 시작되고, 동생의 수험생활이 끝나니 내가 아파버리는 상황. 이런 기막힌 시간표를 짠 운명에게 왜 이렇게 짰냐고 원망해야 할까, 겹치지 않게 일어나게 해준 것에 감사라도 드려야 할까 헷갈릴 정도로 위태위태했던 지난 시간들.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가족 여행 갈만한 시기는 없었다. 즉 올해가 가장 적기인 셈이다.


 이쯤에서 질문은 던져본다. ‘만약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여행을 갔을까?’ 내 답은 ‘아니오.’ 이다. 아마 난 친구들과 여행 갔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모였다하면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 못하고 터지기 일쑤인데, 여행까지 가면 고생할 게 뻔할 뻔자라며 자기합리화를 하고는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으리라. 생각해본다. 나의 아픔이 혹시,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이 소중한 사람들과 귀중한 시간을 함께 보내라고 권유하는 운명의 충고가 아니었는가 하고.



 제주도는 포기했다. 대신 출발과 도착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육로 여행을 가기로 결정하고, 동생에게 일정 및 예약을 일임했다. 앞으로 여행갈 일이 많을 테니 이 기회에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계획해서 실천하는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대실패였다. 가족의 여행을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너무 크게 느껴졌던 동생은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밤을 몇 번 새우더니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고 집의 분위기는 날로 악화되어 갔다.


 가족 여행 가기가 왜 이렇게 힘든 걸까. 휴가라 함은 분명 쉼이 전제로 되어야 하건만, 억눌린 일상생활에서 탈출하여 한가함을 얻고자 함이건만 정작 드러난 건 짜증과 울음이라니. 학창 시절, 방학 끝나고 다시 만난 친구들이 어디로 휴가 다녀왔다고 말할 때 들던 부러움과 어디 다녀왔냐는 말에 우물쭈물 하던 그때의 부끄러움들이 다 허무하게 느껴졌다. 특히 동생과 비슷한 나이 때 친한 사람들과 여러 번 기차 여행을 계획하고 떠났던 나로서는 이 상황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내가 전면에 나서야 했다.


 ‘그래 이 시간은, 동생 어른 좀 만들라고 이것저것 좀 가르쳐주라고 주어진 것이라 여기자. 나이 들어서 동생에게 하나하나 일러주기에는 힘이 달리는 부모님의 짐을 대신 좀 지라고 주어진 시간이다. 최선을 다하자.’



 출발 예정일을 이틀 앞두고 동생이 그간 모은 자료들을 인계받아 끝냈다. 이미 많이 방문했던 곳이지만 그동안 변화도 좀 있다고 들었고, 그 당시 예산 및 교통편의 문제로 보지 못 했던 곳들이 마음에 남아 ‘순천-보성-담양’ 2박 3일 코스로 짰다. 병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여행 사진을 보며 이야기했던 여러 에피소드들이 펼쳐졌던 장소, 그곳을 직접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한몫했다. 그렇게 해서 떠난 최초의 가족 여행은, 비록 하하 호호하는 순탄한 여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상한 일정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도 시켜준 소중한 시간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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