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내가 일반 병실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승현이 형이 연가까지 쓰고 병원에 왔다. 내가 좋아하는 고구마 케이크도 하나 들고 와서 진단서 문제부터 여러 가지 신경 써야 할 것들을 한방에 해결해주었다.
공중보건의사는 병가를 1년에 7일을 초과하여 사용하게 되면 진단서가 꼭 필요하다. 2월 29일부터 입원했고 오늘이 3월 9일이니, 공휴일과 주말을 제외하면, 딱 7일 째. 그래서 내일부터는 진단서가 꼭 필요했다. 그 때문에 부모님은 계속 병원에 진단서 발급을 부탁했지만, 조직검사 결과가 나와야 해줄 수 있다며 번번이 거절당했다. 보험 문제도 걸려있고 해서 정확한 진단명이 나오기 전에는 분쟁의 소지를 주지 않기 위해 발급을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 말로는 형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면담 신청하고 곧바로 진단서를 받아냈다고 했다. 여러 전문용어로 대화하면서 항의하는 모습이 마치 구세주처럼 보였다고. 당장 진단명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금의 몸 상태가 공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입증할 문서가 필요할 따름이라며 조목조목 따지는 모습이 멋있었다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번갈아서 몇 번을 넘게 찾아가도 만질 수 없었던 진단서는 형이 도착한 지 30분 만에 수중으로 떨어졌고 그 진단서도 형이 직접 보건소장에게 전달해주기로 했다.
형은 나를 보자마자 증상들을 체크했다. 수술 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어지럼증, 이따금씩 찾아오는 가슴 두근거림 등을 듣고 간단히 설명도 해주고, 감각 및 운동 능력도 확인했다. 별 문제 없음을 축하해주면서 ‘휴민트(HUMINT)’ 를 통해 얻어낸 수술 경과 및 소견, 향후 있을 법한 치료를 포함한 여러 조언을 해주고 돌아갔다.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는 것조차 만류하고 떠나는 형을 보며 나에게 이런 인연을 만들어 준 운명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해 했다.
휴민트(HUMINT)
: human(사람)과 intelligence(정보)의 합성어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얻은 인적 정보
수술했을 때 보인 소견은 악성에 가까움. 하지만 양성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음.
악성이라도 grade는 낮아 보임
뇌는 악성이라도 위치나 subtype이 괜찮다면,그렇지 못한 양성보다 예후가 좋음
만약 양성으로 판정난다면 간단한 치료로 끝이 나기도 함
방사선 치료를 할 수도 있음. 그렇다고 악성이라는 것은 아님.양성도 할 수 있는 것이 방사선 치료
수술도 잘 되었고, 지금 증상을 보았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나쁜 가능성들을 하나 둘 잘 버리고 가고 있음. 걱정하지 말고 마음 굳게 먹는 것이 중요함.
형이 전해주고 간 이야기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블러핑이었다. 수술 후 소견은 전혀 희망적이지 않았고 지난 2년 간 막내의 평소 모습을 보았던 형들은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리 걱정하고 불안에 하고 있을 동완이에게는 진실을 전해주는 것은 좋지 않다. 차라리 곧 받을 충격에 견딜 수 있도록 맷집을 키워두자.’
개인의 이익이나 복지를 위해서 개인의 자율성을 방해해도 된다는 생명 윤리 원칙 중 하나인 ‘온정적 간섭주의’의 발동. 그것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때 모든 것을 이야기 해주었다면 지금의 나는 여기 없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모두의 침묵으로 쌓아올린 조작된 희망의 댐은 후에 조직검사 결과가 가져온 충격과 공포에도 휩쓸리지 않도록 하는 1차 방어선이 되었다.
(21 완의 귀환 Ⅳ 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