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려놓음 38 던져진 주사위(상)Ⅲ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by 한남



38 던져진 주사위(상)Ⅲ




한참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혹시 면담인가 싶어 잔뜩 긴장하고 쳐다보니 바이탈 체크하러 온 학생간호사였다. 순간적인 긴장의 여운 탓인지 혈압도 체온도 높게 측정되었다. 당황한 학생간호사는 간호사를 부르러 갔다. 다행히 조금 있다 찾아온 간호사가 체크할 때는 정상이었다. 별 문제 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며 미소 짓는다. 친절하다. 환자 입장에서 있어보니 좋은 의료인이 되기에 필수적인 요소들이 잘 보인다.


환자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친절한 행동

신뢰를 주는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

권위자의 여유로운 모습에서 느껴지는 확신


하나하나가 벼랑 끝에 내몰린 환자에게는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신뢰가 되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환자는 위기에서 탈출한다. 나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시간이 잘 안 간다. 나올 듯 말 듯한 검사결과를 기다리느라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 한 번 못했다. 특히 임 여사님에게 연락 한 번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린다. 분명 걱정 많이 하고 계실 것이다.

병동 안을 산책하면서 PA간호사나 전공의를 마주칠 때마다 검사결과를 몇 번이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아직’ 누군가 조직 샘플을 훔쳐간 것 같은 망상에 사로잡힌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검사결과가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어제 읽은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 『그 가을 사흘 동안』의 한 구절이 자꾸만 생각난다. 다시 책을 꺼내 펴보았다.


카운트다운이 제로를 앞둔 긴박감과 도저히 단념할 수 없는 절실한 소망이 두 가닥의 새끼줄이 되어 나를 쥐어짜는 것 같다. 나는 그 일이 안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기다림을 멈추지 못한다.

나의 주체할 수 없는 이 마음을 이토록 기막히게 설명, 아니 예언할 수 있음에 전율을 느낀다. 하지만 아니다. 기다림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맞지만 난 그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이런 마음을 열심히 노트에 옮기던 오후 3시. 간호사가 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심장이 뛴다. 터질 듯이 뛴다. 이리 심장을 뛰게 만드는 것이 기대감인지 공포인지 분간할 수 없다. 생각보다 아버지는 금방 돌아와 어머니가 병원에 오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면담하기로 결정되었다고 이야기하셨다. 바로 어머니께 연락드렸고 곧 출발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는 오시는 길 급하게 운전하다가 사고 나지 않을까 걱정된다.

면담까지 앞으로 한 시간. 어머니 걱정하랴 검사 결과 걱정하랴 마음만 분주하다. 어머니가 달리고 있을 고속도로, 검사결과가 전송된 교수님의 진료실, 한 시간 뒤의 병실. 이리저리 내달리는 생각을 쫒기 위해 심장도 막 뛰고 손발에는 땀이 주르륵 흐른다. 벌써 지쳤는지 다리는 후들거리고 목소리도 떨린다. 불안하다. 긴장된다.


다행히 어머니는 별 탈 없이 도착했고 바로 두 분이서 면담 받으러 떠났다. 1시간 뒤 아버지와 함께 자못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나타난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다 괜찮다고, 이겨낼 수 있다고, 엄마가 무슨 수를 쓰든지 다 낫게 해줄 수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어머니 눈가에 차오르던 눈물이 임계점을 넘기고 쏟아져 내렸다. 막지 못한 슬픔의 홍수. 댐을 뚫어버린 슬픔의 격렬함은 어마어마했다. 악성이라고. 엄마가 미안하다고. 계속 우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안고 싱긋 웃었다.




39 던져진 주사위(상)Ⅳ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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