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려놓음 49 일상으로의 초대Ⅰ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by 한남



49 일상으로의 초대Ⅰ




외출 당일 몸만 빠져나가면 끝일 줄 알았는데 병원비도 중간 정산해야하고 외출증도 끊어야하고 의외로 절차가 복잡했다. 집에 들고 갈 짐, 병실에 놔두고 갈 짐은 이미 잘 갈무리하여 여퉈두었지만 혹시나 싶어 아버지가 업무를 처리하는 동안 빠진 것은 없었는지 계속 확인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너무 심심하여 수속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환자복을 내던지고 임 여사님이 사주신 프랑스 국기가 연상되는 골프용 비니 모자, 누워있느라 살찐 나를 위해 어머니께서 새로 사온 파란 체크 셔츠, 집에서 가져온 따뜻한 검정 면바지, 병원에 입원할 때 신고 온 갈색 단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일반인 룩으로 빼입고 병원을 활보했다.

환자가 아닌 것 같다. 생각해보면 병원에 입원하기 전 운수 보건지소에서 먹고 자며 환자들을 치료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건강한 몸 상태 아니겠는가. 몰랐을 뿐 내 머리에 박혀있는 종양세포는 분명 그때가 지금보다 많다. 달라진 것은 오직 ‘병식(病識)’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깎여진 머리가 이를 상징하듯 알려줄 뿐이다.


SNS에 주치의의 이름을 슬쩍 검색해보았다. 아무래도 나이가 비슷하니 어딘가에 접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소소한 기대에서 한 짓이었는데 수확이 꽤 컸다. 주치의는 대학 동기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기쁜 마음에 동기에게 바로 전화 걸었다.


정진아, 오랜만이다.
어, 갑자기 웬일이고?
이야기 좀 하면 길다. 좀 있다 이야기해주께. 니 혹시 봉진현 이 사람 아나?
고등학교 친구. 아마 의대 갔다든가 그렇게 들었다. 먼 일인데?
그 사람 내 주치의다.
먼 소리고? 똑바로 이야기 해봐라
내 사실 입원했다. 뇌종양 걸려가지고 수술도 하고 병원에 입원했다. 여기 C병원 신경외과 병동이다.
아 C병원이가? B병원 간 줄 알았더니. 몸은 괜찮나?
문제없다. 수술도 잘 되었고 별 차이 없다.
고생했네. 다행이다. 나중에 셋이서 밥 한 번 먹자. 지금은 좀 바빠 가지고
그래, 그래 나중에 보재이


얻어걸린 재미난 소식을 들고 간호사실에 찾아가 주치의의 위치를 탐문했다. 그리고 의국실에서 나오는 주치의에게 달려가 말했다.


봉쌤, 혹시 정진이 알아요?
네, 알죠. 고등학교 친군데...?
제 대학 동기에요. 우린 친구의 친구입니다~
와 세상 진짜 좁네요. 나중에 시간되면 셋이서 한 잔, 아 술은 안 되는구나. 커피라도 한 번 마셔요.
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전화 번호 교환할까요?
폰 주세요.


내 폰을 받아든 주치의는 전화번호를 찍어주었다. 곧바로 그 전화번호로 잠시 통화 연결시킨 다음 끊으며 말했다.


자주 귀찮게 할지도 몰라요.
그건 안 돼요. 1년차가 얼마나 힘들지 알면서...
농담이에요.


뜻밖의 인맥을 기뻐하며 병실로 돌아오자 수속을 마친 아버지께서 들어오셨다. 뒤이어 PA 간호사도 왔다.


이제 퇴원하셔도 되구요. 일요일에 돌아오실 때 7시까지는 와주세요. 너무 늦으면 다른 환자에게 방해되니까. 그리고 저녁식사는 준비해드릴까요? 아니면 드시고 오실래요?
병원 저녁 타임이 6시니까 먹고 올게요.
네, 그리고 집에 계실 때 명심해야 될 게 몇 가지 있어요. 절대 무리하시면 안 돼요.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아직 스테로이드 때문에 WBC 수치가 굉장히 높아요. 그치만 이 중에 기능하는 거 10개 중 1개도 될까 말까해서 면역력이 매우 낮아요.
저 이사해야 돼서 좀 움직여야 하는데...
근데 감기 걸리고 그러면 아예 방사선 치료를 시작 못할 수도 있어요. 몸 관리 하셔야 돼요.
조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손이나 발에 갑자기 힘이 빠진다든가 열이 나면 병원에 와야 해요. 이 때 외래가 아니라 응급실로 오셔야 해요. 그럼 바로 병동으로 올려보내줄 거예요.


주의사항이 좀 많아 마음에 걸렸지만 집에서 잘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는 다 무의미했다. 그녀는 이어서 MRI 찍으러 중간에 하루 병원에 찾아와야 하며 병원 사정에 따라 일정이 유동적으로 조절될 수 있고, 운 나쁘면 하루 정도는 다시 입원할 수 있는 말도 전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기를 바라며 병원을 나섰다.


퇴원의 그 순간 오늘 아침까지 누워있었던, 그리고 다시 돌아올 침대를 돌아보았다. 그때 내 눈에 보인 건 빈 침대가 아니라 수술 전 거기에 엎드려 마지막 할 말을 노트에 적고 검사 결과가 나온 날 밤 팔뚝을 물어뜯으며 소리 없이 흐느꼈던 나였다. 흘린 마음은 흘려진 대로 그냥 두고 밖으로 나와 택시에 올라탔다.




50 일상으로의 초대Ⅱ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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