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여전히 밖은 쌀쌀했다. 언제 봄이 올까? 내가 다 낫기 전에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빼앗긴 들에 찾아온 봄의 풍요는 배만 아프게 할 뿐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온갖 재미난 것들은 다른 사람들이 즐길 것을 생각하니 너무 싫다. 나라는 톱니바퀴가 빠져 멈춰버린 세상을 잠시 상상해본다. 현실은 그럴 리가 없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내 방문을 열어보았다. 3주 만에 돌아온 내 방은 많이 깨끗해져 있었다. 머리 다친다며 기겁하는 아버지의 외침을 뒤로 하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푹신한 느낌, 부드러운 감촉, 익숙한 냄새, 많이 본 풍경. 어떠한 형태로도 표현이 불가능한 그런 감정을 느낀다. 옷을 훌렁훌렁 벗어버리고 모자도 집어던지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아버지는 “좀 씻고 눕지 그러냐.” 한 마디 툭 던지시고는 자리를 피해주셨다. 침대에 누워 간만의 일상을 만끽하며 집에 있을 동안의 할 일을 생각했다.
① 병원에서 볼 것들 확보 – 드라마, 영화, 예능, 만화, 책 등
② 공부 계획 세우기
③ 이사 추진
④ 짐 정리
공부 계획은 지소에서 책을 가져온 뒤에야 세울 수 있고, 노트북과 패드가 배달되어야 영상 자료를 넣을 수 있다. 즉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짐 정리. 먼지도 많고, 춥기도 하고, 힘쓰는 것은 그러하니 너는 판단만 하라며 아버지께서 주의사항을 일깨워주었지만 괜찮을 거라 말하며 우겼다. 지소에 있는 짐의 양도 나만 알고 있고 아무렇게나 책이 꽂혀있는 것 같아보여도 나름의 질서가 있었기에 다른 사람이 대신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방안의 책들을 모두 꺼내 쌓아 두고 한 권 한 권 고민하며 분류했다.
보관할 것은 A, 애매한 것은 B, 버릴 것은 C. 서점에서 결제하거나 택배상자 뜯은 후로 한 번도 내 손길을 거치지 않은 책들이 엄청 많았다. 동호회에 나가서 취미에 대한 질문을 들으면 “책 모으기에요.” 라고 눙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농담이 아니었군. 거짓말은 안 했네.’
용덕이 형은 하루에 책 한 권을 읽는다는데 거기에 비하면 정말 한 없이 게으른 녀석이다. 좀 본 받아야겠다.
가장 처음은 만화책. 가끔씩은 찾아보는 것과 고등학교 때부터 한 권씩 사 모았던 것, 시리즈 2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C. 이제 서른을 넘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소년 만화는 졸업할 때도 되었다. 게다가 죄다 중고로 산 것들이라 별로 아깝지 않다.
그 다음은 일반 소설 및 교양서적들. 박완서 선생님 작품들과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 김지하 시인의 친필 사인이 담긴 시집은 바로 A로 분류했다. 한 번 읽고는 다시 손이 가지 않아 먼지만 곱게 쌓인 소설책들과 당시에는 최신 트렌드였지만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마케팅서적은 고민 없이 C에 넣었다. 관심이 살짝 있는 여행 및 역사관련 자료와 처세술 관련 책들은 B에 두었다.
나의 미래와 맞닿아 있는 다이어트 서적과 정신건강 관련 서적은 세심하게 걸러내었다.
① 전문자료
② 식욕의 원인
③ 다이어트 실패 원인
④ 다이어트 이론
⑤ 식이조절
⑥ 운동법
⑦ 한방다이어트
다이어트는 이렇게 7개 분야로 카테고리를 나누었고,
① EFT, NLP, MBSR, 하코미, 사상심학 같은 전문 카테고리
② 우울이나 불안을 소재로 한 책
③ 정신분석학과 대중심리학을 기반으로 한 책
정신건강은 이렇게 3개의 큰 카테고리와 각기 세부항목으로 나누어 정리했다. 그리고 각 분야 당 한두 권씩 오래되거나 중요도가 낮은 책을 걸러내어 30여 권을 솎아내었다.
마지막은 한의학 서적들. 교양서적은 임상과 맞닿아 있는 분야는 남겨두고, 의사학(醫史學) 등 기초 분야들은 과감하게 버렸다. 교과서도 예과 때 쓴 것들은 버리기로 했다. 후배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이제는 다 개정되어 쓸모없을 것이다. 상징적 의미로 빨간 책 『한의학 개론』만 남겨두고 모두 C로 분류했다. 본과 교과서는 임상과 관련되어 있어 다 남겼다.
거르고 걸러 C로 분류한 책은 족히 100권이 넘었다. 그래도 지소에서 가져올 책을 생각하면 자리는 부족했다. 결국 B로 분류한 것들의 상당수도 버려야 했다. 그리고 안 볼 것 같지만 버리기에는 아까운 책들은 큰 놈은 박스에 넣고, 작은 놈은 책상 밑 가장 아래 칸에 눕혀 쌓아두는 유배형에 처했다.
나름의 꿈을 가지고 샀던 책들이었는데 아쉽다. 버리는 책, 남아있는 책, 구석에 박아둔 책, 가져올 책 도합 1000권이 넘건만 그중에 본 것은 몇 프로나 될까. 대학교 1학년 때 책 앞에서 살지 말지 고민하는 나에게 나이가 좀 있던 동기 형은 책은 서문만 읽어도 남는 것이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런데 지금 서문도 읽지 않은 책들이 버려지고 있다. 아깝다. 시간만 있었다면 기부라도 했을 텐데 나의 게으름 때문에 그 안에 담긴 귀중한 지적 재산들이 소비되지 못한 채 폐지로 전락해버렸다.
‘중고서점이나 하다못해 고물상에서라도 팔면 얼마 줄까?’
‘폐지 줍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딱 인데, 아파트 부녀회보다는 이 분들이 가져갔으면 좋겠다.’
이런 저런 잡생각하며 여러 번에 걸쳐 내다버린 후 소파에 몸을 던졌다. 침대에는 아직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책들이 가득했다. 잠시만 쉬고 뒤처리를 시작했다. 가져올 책들의 자리를 마련해두느라 잠시 헐빈해진 책장에 책들을 꽂아 넣었다. 자세한 배치는 이사해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 종일 매달린 대작업이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끝에서 나는 지금의 나를 보았다.
‘지금은 좀 어지럽혀져 있지만, 과거의 묵은 것들을 비우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는 과정 중 하나로 그저 스쳐지나갈 시간이다. 최종 도착지는 아니다.’
고단했던 하루가 끝나고 병원이 아닌 집 화장실에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 온가족이 모여 저녁식사하고 드라마를 보았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상생활. 그러나 병원 생활의 흔적을 모두 지우지는 못했다. 병실의 불이 꺼지는 11시가 되자 저절로 하품이 나왔고 부모님은 어서 자야한다며 나를 방에 밀어 넣었다. 게다가 혼자 두기에는 안심이 안 된다며 기어코 이부자리를 이끌고 내 방바닥에 자리하셨다. 병원 생활의 연장 같아 울상이 되어 거부했지만 완강한 부모님을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결국 투덜거리며 침대에 누웠고 몸을 고단히 움직였던 탓인지 집에 돌아왔다는 안정감 때문인지 몰라도 그날 밤은 정말 깊게 잠들었다.
51 일상으로의 초대Ⅲ 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