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벨소리에 잠이 깼다. 휴대폰을 보니 벌써 9시가 넘어있었다. 어젯밤 내방에서 주무셨던 어머니는 이미 출근하고 안 계셨다. 모르는 번호라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받았더니 병무청이었다. 의병제대 관련 일정을 가르쳐주는 전화였는데 내용이 심히 황당했다. 직접 징병검사장으로 검사를 받으러 와야 한다기에 입원 스케줄 때문에 이번 주만 가능하다고 이야기했더니 이미 TO가 다 차서 2주 후부터 가능하다고 했다. 그때는 입원해서 안 된다고 하자 그럼 입원 끝나면 그때 오라며 대충 한 달 뒤에 예약 잡아두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한 달 뒤에도 입원해있으면 어떻게 하나요?
다시 예약 잡아야죠.
그럼 그 때는 금방 예약 잡히죠?
아뇨. 보통 2주는 기다려요.
또 2주요?
네. 그렇죠.
답답했다. 4월 둘째 주에 공보의 인력 배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전에 제대처리가 되기를 바랐다. 그래야 고령에서 한 명을 더 뽑을 수 있고, 운수면 한방진료의 공백을 없앨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물 건너 간 셈. 한 달 뒤는 이미 4월 말. 인력 충원은 그 다음 해에나 가능하게 된다.
그럼 그날 검사받으면 금방 제대처리가 되나요?
아뇨. 재검한 다음에 통과되면 중앙신체검사소에 가셔야 하고, 그럼 거기에서 결정되어요.
중앙검사소? 그럼 두 번 가야하는 건가요?
네. 재검 받아봐야 알겠지만, 아마 그날 날짜를 잡아줄 거예요.
그러면 또 시일이 걸리구요?
네.
그럼 그날 제대 판정되면 바로 제대 처리가 되나요? 아니면 서류 작업이나 여러 문제로 시일이 더 걸리나요?
좀 걸리죠.
그런데 저 공보의이거든요. 공보의는 3년 통틀어서 병가 30일 쓸 수 있는데, 제가 남은 연가랑 병가 다 조합해도 5월 초가 되면 터져버리는데 그럼 어떻게 되나요?
글쎄요. 그건 제 소관이 아니라서요.
어떻게 안 될까요?
네. 그건 저희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네요.
하아... 알겠습니다.
남은 안내사항을 듣고 전화를 마쳤다. 답답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부기관을 지방으로 분산 배치하면서 대구에 중앙신체검사소가 내려왔다는 사실 뿐. 하마터면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로 재검 받으러 가야했다. 짜증이 난다.
‘국방의 의무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못하게 된 것인데, 왜 그 증명의 의무를 오롯이 국민에게 떠넘기는가. 왜 아픈 사람이 왔다 갔다 해야 하지? 좀 더 멀쩡한 사람들이 직접 병원에 와서 증빙 서류를 가져가고 아픈 것을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전화 받을 당시에도, 징병검사장에 갈 때도, 중앙신체검사소에 갈 때도 몸 상태가 별로 나쁘지 않았다.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큰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절차상 문제는 있었지만 출근하지 못한 것으로 문제 삼는 일 또한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 무서웠고, 아픈 것이 마치 잘못 인거 마냥 형사 재판에 끌려온 피고인처럼 직접 자료를 모으고 찾아가도록 만든 병역 시스템이 무척 야속했다.
지금도 생각한다. 병역이 형벌이 아닌 진정 신성한 의무이고 나라를 위한 헌신이라면 의병제대나 의가사제대 관련해서 국가에서 처리 해줘야 한다고. 병역을 치르지 못한 상황이 된 것이 내 잘못도 아닌데 왜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야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다.
52 일상으로의 초대Ⅳ 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