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려놓음 52 일상으로의 초대Ⅳ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by 한남



52 일상으로의 초대Ⅳ




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쉬고 있는데 택배가 있다며 전화가 왔다. 태블릿이거나 노트북이리라. 자료가 풍부한 준수 형에게 전화를 걸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전했다. 힘들었던 시간, 그때 느낀 점, 거기에서 얻은 수확들을 간단하게 20분 정도 이야기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정신 건강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더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고 있었던 형은 조언을 아낌없이 해주면서 읽으면 좋을 책도 추천했다. 한 시간쯤 통화했을 때 숨겨두었던 욕망을 슬며시 내비쳤다.


형 그나저나 집에 책 스캔 떠서 보관한다고 옛날에 스캐너 사고 그러지 않았어?
그랬지. 왜? 스캔 뜨고 싶은 책 있어? 해줄까?
아니, 그건 아니고 혹시 파일 있으면 공유할 수 있나 싶어서.
에이, 그건 안 돼. 요즘 단속도 빡세. 들고 다니기 무거워서 패드로 보려고 스캔 뜬 건데, 하나둘 주다보면 누군 줬네 누구는 안 줬네 뒷말도 생기고 관리도 안 되고. 부담된다. 그래서 너뿐만 아니라 아무한테도 파일 안 줬어. 미안하지만 안 된다.
미안할 거까지야. 무리한 부탁한 내 잘못이지. 알겠어. 어쩔 수 없지.
대신 내가 전에 웹하드에서 긁어모은 책들은 보내줄게. 그것도 꽤 많아. 3GB는 될 걸?
오 좋지. 땡큐 땡큐
이 시키 이것 때문에 전화했네.
겸사겸사 전화한 거지. 그래도 내 아픈 거 공보의 형들 빼면 아는 사람 거의 없다. 수술 전에 온 정희 커플이랑 명아 누나, 은아, 그리고 어제 정진이. 형이 동기 중에는 5번째임
5등이라 고맙~다.
잘못했어. 한 번만 넘어가주라.
조만간 시간 내서 찾아갈게. 깨끗이 씻고 기다려.
응 고마우이.


전화 한 번으로 확보하게 된 수많은 자료를 기대하며 택배를 기다렸다. 마침내 도착한 태블릿과 노트북. 받자마자 바로 준수 형이 보낸 파일들과 클라우드에 저장해둔 자료들을 내려 받으며 같이 택배로 받은 태블릿에 필요한 어플들을 깔았다. 그때쯤 병권이 형에게 전화가 왔다. 보나마나 내 소식을 듣고 놀라 전화한 것이 분명했다.


응 병권이 형. 내 멀쩡하다.
어? 어. 깜짝이야. 먼 일이고 싶었다. 작년에 추나 학회 세미나 때 멀쩡하더니 수술했다는 이야기 듣고 좀 놀랬다.
놀래기는 내 만하겠나. 누구한테 들었는데? 재욱이? 정진이?
내가 졸장인데 어디서 듣든 다 듣지. 모르는 거 없다. 정보원은 비밀이다.
머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상관없다. 직접 전화해주니 고맙네. 나 지금은 집인데 곧 다시 입원하니까 병문안 꼭 와요. 병원에 있으니까 심심해.
바쁘다.
공보의가 머가 바빠. 한 번 와요.
그래 갈게 C병원이라고 했던가?
응 C병원, 올 때는 꼭 전화주고. 기다립니다. 형


본과 3학년과 4학년 때 과대를 맡은 졸업준비위원회장 병권이 형. 왠지 고위층의 위로 전화를 받은 거 같아 기분이 좋다. 어떤 드라마나 영화가 나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궁금해 하며 계속 내려받고 또 내려받았다. 실제로 다시 입원한 병원에서 만화책 몇 편 보고 영상 자료는 하나도 보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별 쓸모없는 짓이었지만 자료를 수집하는 그 시간 자체로도 나에게는 충분히 재미있었고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모았던 드라마와 영화, 예능은 아직까지도 소비되지 못한 채 하드 디스크에 잠들어 있고 준수 형에게 받은 텍스트 파일 또한 1% 정도 밖에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한의사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족족 저장해두었던 각종 강의 자료와 동영상 또한 1TB에 육박하지만 그냥 들고만 있을 뿐이다. 방 안을 가득 메운 책장을 보면 읽지는 않고 정리만 잘 되어있는 책들도 한가득 볼 수 있다. 영락없는 태음인의 모습이다. 그 중에서도 욕심만 많고 실천력이 떨어지는 유형.


『애노희락의 심리학』이라는 책에서는 태음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태음인은 확실히 선(先)접수, 후(後)판단의 경향이 두드러진다.

태음인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다른 체질의 사람들이 소화해내지 못할 정도의 정보량도 소화해낸다. 섣불리 판단하려 하지 않고 일단 쌓아두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보의 홍수 상황에서는 가장 적응이 쉽다.

하지만 아무리 알아봐도 끝도 없이 새로운 정보가 나오게 되므로 판단을 마냥 미루는 악습이 더 심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받아들이는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너무 과도한 정보량을 수집해버리고 그 양에 질려 쌓아두고만 있는 ‘실수한 태음인’이 바로 나, 김동완이다. 수술 후 운명론적 사고에 심취한 나는 가끔 생각한다.

‘지금 이 시간들은 이렇게 쌓아둔 정보를 소화하라는 의미에서 운명이 나에게 부여한 시간이 아닐까?’ 하고.




53 일상으로의 초대Ⅴ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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