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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09. 2016

[소설] 내려놓음 55 일상으로의 초대Ⅶ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55 일상으로의 초대 Ⅶ




 병원이 블랙홀도 아닐진대 집에서는 빠르게 흐르던 시간이 또다시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1시간 정도 지나자 폰 게임 기회도 모두 소모되어 할 게 없었다. TV도 생전 본 적 없는 아침드라마만 흘러나올 뿐이다. 태블릿, 책, 공책 어느 하나 챙겨오지 않은 나를 책망하며 30분 쯤 더 기다렸을까? MRI 조영제 사용 동의서를 들고 인턴이 찾아왔다. 동의서 내용을 설명해주며 인턴은 나에게 뇌수술을 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냥 매뉴얼대로 행동하는 것이겠지만 빡빡머리에 스크래치까지 나 있는 내 머리를 보면서 물어보는 그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놀림 받는 느낌이 들어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필시 자격지심이리라.


 조영제를 넣기 쉽도록 라인을 먼저 잡아두고 MRI 검사실로 내려갔다. 거기서도 30분 정도 더 기다려야 하는 듯 했다. 심심해서 다시 승현이 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동완 : 마침 교수님 만나서 증상 설명했는데 별 반응이 없네요. 움직일 때도 떨리는지 물으셔서 그건 아니라고 했더니 그럴 수 있다고 그냥 넘겼어요.

승현 : 응 그럴 수 있어. 당연한 거라.

동완 : 역시

승현 : seizure 안하는 게 신기하긴 하다.

동완 : 약 먹어서 증상 조절되는 것일 수도?

승현 : 그건 확률게임이라 그냥 니가 안 하는 케이스인 듯. 이미 증상은 있었어. 옛날에 니가 말한 이상한 맛과 냄새 나면서 떨린다고 했던 그거

동완 : 아 그거, 지금은 안나요.

승현 : 다행히 partial sz. 이었던 걸 감사해야지.

동완 : 그러고 보면 전조증상은 있었네요.그걸 발견 못했네.

승현 : 주변에 의사, 한의사 많아도 별 소용없네. 같이 1년을 근무했는데 나도 몰랐어.

동완 : 그래도 형 덕분에 MRI 빨리 찍어서 발견했네요. 아 이제 찍으러 오라고 하네요.

승현 : 30분 귀마개 잘하고~


 partial sz. - partial seizure (간질 부분발작)


 MRI를 찍었다. 한 달 동안 도대체 몇 번을 찍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찍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변화에 대한 기대를 전제로 하는 것이니까. 자주 찍어 추적관찰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내 몸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서 매일 찍고 싶다. 아직 치료가 시작 안 된 터라 그새 종양이 많이 자라지는 않았을까 겁도 나고.



 집으로 돌아와 운수지소에 갈 채비를 했다. 사촌 매형도 같이 도와주기로 했다. 여사님께 이제 출발한다고 연락드리고 매형 차에 탔다. 늘 출근하던 길의 풍경. 조수석에서 바라보니 생경하다. 이제 이 길을 출근하기 위해서 지나갈 일은 더 이상 없다. 갑작스럽고 준비되지 못한 이별이기에 더 뼈아프다.


 대구에서 태어나 주욱 대구에서 자랐다. 명절마다 찾아간 친가도 부산, 외가는 정읍시 한복판. 모두 시가지였기에 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흙이라고는 놀이터의 모래, 소풍 때 가보는 몇몇 산이 전부인 ‘도시인’이었다. 그래서 문학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자연과 벗 삼을 수 있는 고향은 상상 속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고령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고령은 예전부터 인연이 깊었다. 어머니의 첫 발령지는 고령군 성산면의 성산중학교. 내가 5살이던 해까지 근무하셨다. 그 다음 부임지는 고령군 고령읍의 고령중학교. 지금은 대가야읍의 고령고등학교이다. 여기에서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근무하셨다. 중간에 동생 낳느라 육아 휴직 하신 기간을 제외하면, 태어났을 때부터 초등학교 4학년까지 고령은 나에게는 ‘어머니가 계신 곳’이었다. 심지어 방학 때는 어머니 보충수업에 따라가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아 학습지를 푼 적도 있었다. 어린 나를 돌볼 사람 없어서 한 고육지책이었는데 그 덕에 나는 교감선생님과 함께 근처 실업계 고등학교 농장에서 타조도 보고 토끼 먹이도 주는 추억을 가지기도 했다.


 고령은 멀미가 심했던 터라 멀리 놀라가는 것이 힘들었던 나와 내 동생에게 최적의 소풍장소가 돼주기도 했다. 지산리 고분군, 대가야 왕릉전시관, 대가야 박물관, 대가야 역사 테마관광지 등등 지금처럼 관광지의 구색을 갖추기 이전부터 수도 없이 드나들었다. 그랬던 터라 고령에서 근무하기로 결정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집에서 30분 만에 갈 수 있는 장점도 있었지만 왠지 고향으로 간다는 느낌이 특히 더 설레게 만들었다.




56 일상으로의 초대Ⅷ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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