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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09. 2016

[소설] 내려놓음 58 돌아온 병원Ⅰ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58 돌아온 병원Ⅰ




 5박 6일 짧은 외출이 끝나는 일요일. 지만이 형의 결혼식이 있었다. 저녁에 입원하기에 가는데 지장없었지만 감염도 조심해야 하고 이런 저런 일들이 마음에 걸려 나기 형을 통해 축의금만 전달했다. 이번 수술에서 큰 도움을 준 형이었기에 더욱 아쉬웠다.


 집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병원에서 필요한 책이 생기면 가족들이 찾아오기 쉽도록 집에 있는 책 목록을 작성하고 분야별로 두 세권씩 뽑아 남아도는 시간을 이용하여 숙지할 것을 다짐했다. 뿐만 아니라 다이어트 계획도 같이 세우고 마음 수련에 관한 시간도 배당하였다. 아마 모든 것들이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면 지(智), 덕(德), 체(體)를 모두 갖춘 사람으로 탈바꿈 해있으리라. 나의 거창한 계획을 들은 준수 형은 1/3만 읽어도 성공이라며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난 자신에 가득 차 결과로 증명해보이겠다며 일축했다.


 입원해있는 동안 지루하지 않도록 드라마를 잔뜩 받아둔 노트북과 태블릿, 그리고 공부할 책을 챙겨들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언제쯤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를 가늠하며 들어온 병실에는 MRI 찍으러 간 날 계셨던 그 할아버님이 그 모습 그대로 자리에 앉아 계셨다.


 ‘꼭 동상 같다.’


 어머니는 한층 좁아진 자리에 불만을 표했다. 우리에게 배당된 면적은 확실히 많이 줄어 있었다. 굳이 사람 없는 자리를 놀리느니 조금은 더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할아버지 측에서 내 침대를 구석으로 옮긴 것이 분명했다. 잠시 셋이서 의논한 뒤 먼저 말을 꺼내서 얼굴을 붉히느니 그 쪽에서 먼저 비켜주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부모님이 챙겨온 짐을 이리저리 정리하는 동안, 침대에 앉아 집에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손댄 적 없는 『내가 비록 암에 걸렸지만』 그 책을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다.


 책에서는 암에 대한 주요한 감정의 목록으로 ‘충격, 두려움, 분노, 분개, 슬픔, 불안, 공황, 자기연민’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충격 받고 두려워했으며 슬퍼했다. 이런 운명 앞에 놓인 나 자신을 불쌍히 여겼고, 운명의 가혹함에 분노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지금 나에게는 약간의 두려움과 많은 불안감이 남아있을 뿐 나머지는 사라지고 없다. EFT 작업할 분량이 적어서 좋다.


에너지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부정적 느낌/생각/믿음/기억의 발현은 반가운 일이다.
그런 것들이 의식, 우리가 인지하는 세상에 들어오면 그것들을 해소할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에게 partial seizure는 지난여름부터 있어왔다. 그것은 그때 이미 나의 측두엽에는 문제가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내 몸은 아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다만 몰랐을 뿐이다. 이제 인지된 세상에 들어오니 치료가 시작되었다. 어지럽고 토하는 걸 단순히 체한 증상이라 여기며 덮어놓았다면 지금도 나는 병을 키우고 술 마시며 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정적인 그것’ 또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미움 받는 것을 강박증처럼 싫어했다. 그래서 욕구를 표현할 때 머뭇거리는 경우가 많았고 속으로 삼키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때 미처 드러내지 못한 부정적인 기운들이 해소되지 못하고 지금의 종양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용이 형은 ‘너는 너무 물러서 문제야.’ 라고 했고, 승현이 형은 ‘동완아, 모질게 좀 살아.’ 라고 충고했다.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잘 때 먹을 약을 전해주러 온 간호사는 내일 아침 방사선종양학과 면담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아픈 이후로 처음 해보는 면담. 어떤 부작용들로 나의 마음을 휘저어 놓을지 살짝 걱정하며 잠들었다.



 내 집이 아닌 병원, 새벽같이 일어나 부산스레 움직이는 옆 침대 할아버지, 지난 목요일부터 먹기 시작한 야채수가 가져온 배뇨욕구. 모든 것들이 한데 섞여 밤잠을 설쳤다. 연신 하품을 하며 아침 식사를 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면담하러 내려오라는 이야기를 기다렸다. 연락이 왔다. 환자복에 잠바 하나를 걸치고 내려갔다. 라파엘관 6층에서 스텔라관 지하1층까지 거리가 좀 되었다.


 ‘앞으로 이 길을 많이 지나가겠지.’


 대기실에 잠시 기다리다 아버지와 함께 방사선종양학과 선생님을 만났다. 동문 선배 한의사를 똑 닮은 그 분은 매우 친절했다. 부작용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바로 뒤이어 치료 계획용 CT를 찍을 거라고 이야기하며 선생님은 CT와 MRI영상을 모니터에 띄우고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하지만 내 눈과 의식은 나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모니터가 아닌 주치의의 소견이 담긴 차트를 띄운 모니터로 향했다. SOAP 형식*에 맞추어 기록된 차트는 온통 영어로 빼곡했다. 선생님의 말씀을 귓등으로 들으며 차트를 읽었다.

 ‘어차피 듣더라도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고, 그냥 믿고 따르는 게 장땡이야.’



SOAP (subjective, objective, assessment, plan)

Subjective : 환자의 직접 표현에 의한 자료

Objective : 의료진들에 의한 관찰, 검사결과 같은 객관적 자료

Assessment : 환자의 질병 진행과정 및 상태에 대한 평가

Plan : 향후 치료 계획 및 변경에 대한 결정



 차트에 적힌 각종 수치들은 꽤 긍정적이었다. 그렇게 흡족한 마음으로 보다가 충격적인 것을 하나 발견하였다.


A : Glioblastoma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말했다. glioblastoma만 아니면 된다고. glioblastoma는 교모세포종이다. 예후가 무척 나쁘다고 공부했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여러 복합 치료에도 불구하고 평균 생존 기간은 12~15개월에 불과하다는 악명 높은 병. 그때부터 방사선종양학과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모든 부작용에 관심이 사라졌다.




59 돌아온 병원Ⅱ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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