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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09. 2016

[소설] 내려놓음 57 일상으로의 초대Ⅸ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57 일상으로의 초대Ⅸ




 사실 그날 저녁에는 공보의 모임이 있었다. 내가 수술하고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던 그때, 오래전부터 예약되어 있었던 골프 필드 모임이 있었는데 그 뒤풀이였다. 실력이 모자라서 참가하지 않기로 했는데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만약 내가 참가하기로 되어있었더라도 나대신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웠겠지만 마냥 즐겁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자리는 이틀 뒤 결혼할 지만이 형의 총각 파티도 겸했다. 때마침 장소도 동네 근처라서 가는데 큰 부담은 없었다. 그러나 가지 않았다. 좋았던 일을 되새기며 뒤풀이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한 인간을 축하하는 자리에 ‘나’라는 존재는 걸맞지 않기 때문에. 나는 주인공 자리를 지만이 형에게서 빼앗고 주제도 골프나 결혼 생활이 아닌 무거운 나의 병상 생활이 될 것이다.


 그래도 가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지금 입원하면 언제 퇴원할지도 모르고 다음 달 14일이면 지금의 3년차 형들은 고령을 벗어나 각자 자신의 일터를 찾아 떠난다. 어쩌면 우리가 결혼식장이 아닌 곳에서 다 같이 만나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자리는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같이 배드민턴하고, 축구하고, 볼링치고, 탁구치고, 골프하고, 여행도 가고, 술도 자주 마셨다. 각자 스케줄 따라 멤버 구성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 안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 그래서 나기 형은 “이 모임은 동완이 니가 징징거리는 거 우리가 다 받아주면서 유지되었다.” 고 농담하곤 했다. 사실 이 모임의 시작이 된 점심시간의 배드민턴도 내가 제안한 것이었다.

 시작도 중간에도 항상 내가 있었는데 끝마무리에는 오직 나만 없다.


 먹고 자고 일하던 지소에서도 방을 빼고, 같이 놀던 무리의 마지막 모임에도 나가지 못하는, 일상에서의 이탈을 격렬하게 느끼며 그날은 그렇게 잠들었다.


 다음 날, 대강의 책들은 정리되었지만 이불, 베개, 옷가지 등등 아직 집어넣지 못한 짐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도 주말이라 온 가족이 집에 있어 일손이 많았다. 덕분에 먼지 날린다며 카페로 피신해있을 것을 명받았고, 책 이외의 짐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기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감염되어 염증이 생기면 방사선 치료가 연기된다는 PA간호사의 말을 상기하며 부모님은 마스크를 쓰고 옷을 단디 껴입기를 당부했다.

 두꺼운 검은 양말과 등산복 바지, 회색 셔츠에 짙은 갈색 니트, 그 위에 빨간 다운 점퍼, 머리에는 프랑스 국기 느낌 나는 골프용 비니, 얼굴에는 검은 뿔테 안경과 파란 마스크. 패션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보온 기능에만 초점을 맞춘 채 3월 말의 토요일, 동네 카페로 길을 나섰다.


 병실과 집, 항상 부모님과 같이 있었다. 온전히 혼자 마주하는 바깥세상은 처음이다. 내가 혼자서 운전하고 일하고 돈 벌고 돈 쓰고 그렇게 했었다는 사실이 먼 옛날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이제 카페 알바생에게 레모네이드 주문하는 것조차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음료를 받아들고 창가에 자리 잡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생각해본다.

 ‘연인은 생길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난 항상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었다.

 ‘난 외로움을 많이 타는구나. 자존감이 부족해서 그런 건가?’


 중2 때부터 대학교 1학년까지 학창 시절 내내 한 여자만을 짝사랑했었다. 힘들었던 시절 나를 버티게 해준 그녀에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고백하고 시원하게 차였다. 그 일은 고백은 도전이 아닌 확인이라는 걸 몰랐던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거절당하고 바로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1년 반에 걸쳐 121.5kg에서 78kg까지 43.5kg을 감량했고, 어느 순간부터 또다시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력으로 느껴지던 그 사람의 모습이 단점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 마음이 짜게 식어갔고 그렇게 혼자 시작하고 혼자 끝냈다.


 그리고 본과 1학년 가을, 살을 뺀 뒤부터 폭발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온 세상이 내 발 아래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고 마음껏 활개치고 다녔다. 그러다가 분에 넘치는 인연을 만나 모태솔로를 탈출했고 많은 시간을 같이 했다. 정말 과분한 사람이었다. 처음이라 실수도 잦았을 텐데 크게 싸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정도로 날 이해해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졸업하고 장거리 커플이 되면서 만나는 빈도도 줄고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그 후로 대형 포털 사이트에도 검색되는 전직 소설가, 대학병원 간호사 등 매순간 누구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혼자인 나를,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지 않은 나를 경험한 일이 없었던 나이기에 지금이 더 불안하고 외로움을 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중환자실에서는 결혼을, 지금은 연애를 꿈꾸는 나. 종족 번식의 욕구가 괜히 본능이 아님을 느끼는 지금이다.




58 돌아온 병원Ⅰ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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