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려놓음 07 잊혀진 시간 Ⅱ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by 한남



07 잊혀진 시간 Ⅱ




본과에 올라가면 공부할 내용이 워낙 많기 때문에 우리 학교는 모든 학생들이 공평하게 과목을 하나씩 맡아 시험 준비 자료를 만들어서 공유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때 내가 맡은 과목은 ‘심계(心系) 내과학’이었다. 심계(心系)는 서양의학에서 순환계와 신경계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순환계는 다른 동기가 맡았고 나는 신경계 파트를 맡았다. 열성적으로 가르치는 교수님의 수준을 맞추느라 다른 서적들도 참고해가며 열심히 자료를 만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각종 MRI, CT 사진 보는 방법부터 중추신경계와 말초신경계 질환들의 진단법 및 특징 등이 내 담당이었고 그 안에는 ‘뇌종양’도 있었다. 그렇기에 특징이나 예후에 대해 그럭저럭 알고 있었다.



뇌종양두개강(頭蓋腔 intracranial), 즉 ‘두개골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발생한다. 따라서 다른 종류의 종양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게 된다. 만원버스를 상상해보자. 여기에 불청객이 난입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안에 이미 타고 있는 승객들은 어떻게 될까? 벽으로 밀려 짓눌리기도 하고 빈자리를 찾아 출입문 계단으로 내려가기도 할 것이다. 뇌종양도 마찬가지이다. 종양세포라는 불청객이 두개강으로 난입하게 되면 정상 뇌조직은 눌리고 고통 받게 된다. 심하면 구멍을 찾아 뇌가 흘러나가는 ‘헤르니아(hernia)’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크기와 성장속도는 뇌종양의 매우 중요한 변수다.


뿐만 아니라 병변의 위치 또한 중요하다. 뇌는 모든 기능을 관할하는 장기이기에 제거에 소극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특히 생명을 주관하는 부위나 깊숙한 심부(深部)에 종양이 발생할 경우 치료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이와 같이 양성과 악성의 구분도 중요하지만 크기와 성장속도, 위치도 고려해야 하는 심각한 병이 바로 뇌종양이다. 그 이외에도 subtype 또한 증상 및 예후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예전 기억이 하나 둘 떠오를 때마다 지금의 상황이 더 실감나지고 무서워져 갔다. 상상해보았다. 두개골을 잘라내고 뇌를 열어 이상조직을 제거하는 모습을. 생각은 본과 1학년 때의 해부실습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2시간 넘게 톱질해도 잘 쪼개지지 않던 두개골

그 안에서 악취를 풍기며 나타난 뇌

시신을 기증한 큰 뜻에 경의를 표하며 잘라보았던 뇌조직들


나를 수술할 집도의에게 경외심이 생긴다. 실수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스친다. 하지만 그 실수는 내 삶에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 파급력이 궁금해졌다. 덕경이 형은 재활의학과 전문의이다. 아마 수술 후 재활하는 환자를 많이 보았으리라. 그래서 형에게 물었다. 답은 금방 돌아왔다.


일상생활을 수행할 수 있는 수준까지의 회복을 기준으로,
보행이나 운전 같은 ‘gross motor(대근육 운동)’은 6개월
글씨 쓰기 같은 ‘fine motor(소근육 운동)’은 12개월


이 정도가 통상적이라 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한 대답은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넘겨버렸다. 사실 그 파트는 재활의학과 담당이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뇌수술을 앞둔 환자는 누구나 짐작하지 않을까? 수술이 가져올 수 있는 여러 일들을 말이다. 특히 ‘나’라는 존재에 대한 위협은 본능적으로 느끼게 마련이다. 존재의 연속성에 대한 때 아닌 고찰이 시작되었다. 이걸 ‘테세우스의 배’* 문제라고 하던가?


판단력이 사라져 버린 ‘나’는 ‘동완’인가?

예전 기억이 없어진 ‘나’는 예전의 ‘나’와 같은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아니다’였다. 현재는 과거 선택들의 집합체이다. 선택의 기억이 없는 ‘나’와 선택 기준을 잃어버린 ‘나’가 과연 ‘동완’일까? 판단력이나 기억, 둘 중에 하나라도 남아있지 않다면 ‘동완’의 영혼은 그냥 거기서 끝이다. 비록 숨 쉬고 있더라도 그 안에는 있는 영혼은 ‘동완’이 아니다.

‘아니 무엇보다 수술 후에 내가 살아있을 수는 있을까?’



그때부터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두려워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 흔적 없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두려워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엇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어렵사리 구해온 노트에 모든 것들을 써내려갔다. 지난 삶에 대한 반성과 수술 이후의 계획,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공포까지 모두 적었다. 그것도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대로 적지 않고 과거와 미래, 현재를 구분해서 기록했다. 만일의 상황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보더라도 헷갈리지 않게.



사실 병실에 올라온 후부터 수술 전 날까지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영화 《그래비티》의 한 장면처럼 한없이 펼쳐진 암흑 속에서 헤매는 심상(心象)만 존재할 뿐. 실수로 저장 안함 버튼을 누른 것처럼 그 부분만 싹 빠져있다. 그때도 하루는 분명 24시간이었을 텐데, 나를 찾아와준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한 시간들과 검사실에서 방치된 순간의 막막함만 띄엄띄엄 기억난다. 지금 이렇게 지난 시간을 재구성할 수 있는 것도 순전히 노트의 덕분이다.

노트의 공은 이 뿐만이 아니다. 사라진 시간에 나에게 쏟아졌던 많은 이의 사랑도 되찾게 해주었고, 힘들었던 그 때 도대체 나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남겨주었다. 그리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마냥 공포에 지배되지 않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는 자부심도 함께 주었다. 지금도 가끔씩 마음이 힘들 때면 그때의 기록을 보곤 한다.


그렇게, 힘들었던 시간은 나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고 조용히 내 곁을 떠났다.




(08 떠날 준비 Ⅰ에 계속)





# 테세우스의 배

'물체의 연속성'의 정의에 대한 논제 중 하나

미노타우르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인들은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던 것이다.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때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번 수리한 배에서 다시 다른 판자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에선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의 배의 조각은 단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 플루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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