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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14. 2016

[소설] 내려놓음 72 일상으로의 복귀Ⅱ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72 일상으로의 복귀Ⅱ




 뜨거운 마음으로 나는 지쳐버린 나의 심신(心身)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서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사전 투표를 하러갔다. 방사선 치료와 약물 치료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만큼 감염에 유의해야 했기에 사람들이 많이 몰릴 투표 당일은 피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다 빠져버린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해 덮어쓴 모자, 감기 걸릴까봐 꼭꼭 껴입은 철지난 잠바와, 얼굴을 가리기 위한 마스크. 이런 기괴한 조합으로 많은 사람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투표에 빠지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사전 투표 기간 이후에 퇴원했어도 선거일 이전이었으면 더 기괴한 옷차림이든 말든 주저하지 않고 투표장에 갔을 것이다. 만약 퇴원을 못 했다면 환자복 차림으로라도 선거를 치렀을지도 모른다. 그건 나의 신념이었다. 오죽했으면 교수님한테 총선 전에는 나가야한다고 졸랐을까.


 어려서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오후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는 학원 선생님 아버지, 아침 일찍 출근해서 어둑해질 때 퇴근하는 학교 선생님 어머니. 나는 저녁 식사를 외갓집에서 해결해야 했다. 바로 앞 아파트에 사셨기에 찾아가는데 별 불편함이 없었고 할머니의 뛰어난 음식 솜씨 덕분에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어 더 좋았다. 저녁 먹으러 갈 때쯤은 점당 10원 고스톱 테이블로 가득한 노인정 카지노 폐장 시간과도 엇비슷해서,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노인정에 들러 할아버지를 모시고 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비밀이라며 슬쩍 용돈을 찔러주셨고 그것은 외갓집에서의 식사가 주는 또 하나의 재미였다.

 할아버지께서는 집에 들어오시면 항상 뉴스를 트셨다. 그 덕에 갓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한 지도 얼마 안 된 2002년 초, 그 당시에 있었던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과 한나라당의 경선까지 모조리 생방송으로 지켜보았고 아직도 많은 장면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전북 정읍에서 일가를 이루신 외할아버지.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대구에 터를 잡고 경북에서 교편을 잡은 어머니. 그런 나에게 지역감정은 또래 아이들에 비해 더 크게 다가왔고, 그것은 지역감정의 근원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더 정치에 관심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광주에서 5.18 민주화 운동이 벌어질 때 어머니는 정읍여고 학생이었고, 광주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은 분이셨다. 어머니께서 해주는 그런 이야기들은 해방 이후 계속된 독재정권과 군사정권 아래에서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민주화 열사에 대한 존경심으로도 이어졌다.

 그 때문일지 몰라도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났으니 시험 범위에 안 들어간다며 모두가 잠자는 국사 시간에, 오직 나만이 일어나 근현대사 수업을 들었다. 강력한 권력 앞에서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던 민주화 운동에 같이 분루를 삼켰고, 결국 승리를 쟁취하는 6월 민주 항쟁 부분에서는 끓어오르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내 삶의 모토인 ‘소시민 중 1등’도 고등학생 때 정했지만, 노모 히데오가 비판한 ‘도전자를 비웃는 소시민’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던 시기도 그때였다. 정말 투표가 하고 싶었다. 투표권이 없는 게 억울할 정도로. 그때 다짐했다. 능력이 닿는 한 내 의지로 투표를 거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뽑을 사람이 없다면 빈 곳에 도장 찍더라도 갈 것이라고. 그래서 투표권이 주어진 이후로 투표를 거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 신념을 이어 가기 위해 가고 있다.


 사실 이는 보답이기도 했다. 지루해 미칠 것 같은 입원 생활에서 20대 총선 관련 보도는 훌륭한 심심풀이 땅콩이었다. 시시각각으로 터지는 총선잡음에 실소가 흘러나왔고, 이는 나와 아버지의 대화거리도 마련해주었다. 병원에 같이 있으면서도 나는 책을 정리하고 아버지는 책을 보았었다. 대화가 거의 없는, 그야말로 경상도 부자(父子)의 전형적인 모습. 그 정적을 깨뜨려준 것이 바로 정치였다.

 투표장에 가서 신분증을 내밀었다. 진행요원은 신원 확인을 위해 모자와 마스크를 벗을 것을 요구했다. 반쯤 벗겨진 머리를 드러내며 지시에 따르고 투표하고 나왔다.


 ‘사전 투표오길 잘 했네.’


 집에 돌아와 씻고 방에 들어왔다. 집에 있으면 도통 앉아있는 일이 없다. 늘 그렇듯 침대에 누웠다가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방정리가 마음에 쓰여 한참을 청소했다. 그 후 저녁도 먹고 TV도 보며 간만에 다시 찾은 일상생활을 즐겼다. 이제는 다시 입원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어느새 10시가 되었고 병원에서처럼 다시 한 번 샤워를 했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침을 꺼내들었다. 알코올 솜으로 침놓을 자리를 정성스레 소독하고 소화기를 다스리는 침을 놓은 다음 20분 정도 유지시켰다가 발침(拔鍼)하고 다시 알코올 솜으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이제 EFT 시간. 항암제 복용을 앞두고 찾아올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 같은 감정의 과잉 상태를 제거하는 작업을 실시한다. 그러면 대충 11시가 된다. 시간이 좀 남았으면 작년에 신청했다가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천주교 통신 교리책을 보거나 어머니께서 사주신 혜민 스님의 책을 읽으며 마음을 한 번 더 가다듬는다.

 모든 사전 작업이 마무리되면 두꺼운 흰 비닐 안에 담겨있는 Temodal 160mg을 꺼낸다. 연분홍빛과 우윳빛의 100mg 캡슐 1개, 짙은 개나리색과 흰색의 20mg 캡슐 3개를 동시에 입 안에 털어 넣고 물과 함께 삼킨다. 그리고 강한 치유의 군대가 종양 요새를 섬멸하는 과정을 떠올리면서 잠자리에 든다.


 항암제 먹고 첫 날 토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거른 적 없던 나의 성상세포종 치료 ‘루틴’. 그 덕인지 몰라도 첫 날 이후로 약 먹고 토하는 일은 없었다. 치유력과 종양이 벌이는 전투 때문에 알 수 없는 생각의 파편들이 쏟아져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건 낮에 다시 보충하면 될 일, 큰 문제는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누워있는 곳은 병실이 아닌 내 방. 이제 더 깊은 잠을 잘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73 일상으로의 복귀Ⅲ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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