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려놓음 09 떠날 준비 Ⅱ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by 한남



09 떠날 준비 Ⅱ




11시가 되고 병실의 불은 꺼졌다. 야속하다. 영원히 잘 수 있는 마당에 왜 이렇게 빨리 밤이 찾아온 걸까? 하루만 더 살고 싶다. 어둠을 먹고 자라난 공포가 밀물처럼 슬글슬금 밀려온다. 밀어내지만 더 큰 물결로 마음 가장자리를 삼킨다. 의연하겠다는 다짐은 갯벌에 쓴 글씨처럼 허망하게 쓸려 내려간다. 무섭다. 덕경이 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동완 : 형 미치겠어요.

덕경 : 왜 이말 안 하나 했다. 올 때 되었다 싶으니 딱 오네. 무섭지. 안 무서운 게 이상한 거다. 생사회복은 다 하느님 손에 달려 있는 거다. 너무 걱정 말고 겸허히 맡기고 좋은 결과 있기를 기도해라. 인간의 힘은 이럴 때 나약하고 과학의 한계가 있는 거다. 하느님에게 의지해야 해.



난 종교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 눈에는 비친 우리나라의 종교는 ‘기복신앙’에 지나지 않았다. 절에 다니는 이모도 결국 가족과 주변 사람의 ‘평안’을 기원하러 간 것이고, 성당에 다니는 소꿉친구의 어머니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이런 모습들이 실제의 종교가 추구하는 모습과는 다르다 생각했다. 욕심을 버리라고 가르치는 부처님과 예수님 앞에 복을 욕심낸다는 것은 어불성설 같았다. 그러나 상황이 급해지니 그 모든 것들은 다 쓸데없는 이야기였다.

그냥 절대자를 붙잡고 다짜고짜 살려달라고 빌었다. 이번에 받은 관심, 사랑, 도움들 다 갚아야 하고,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이 남았다고... 막상 급하니까 찾는 가짜 신자였지만 그 마음만큼은 진실되게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마음속으로 몰래몰래. 그랬던 나에게 형은 기도를 추천했다.




동완 : 그래도 될까요? 너무 늦은 거 같은데 이제 와서 급하다고 징징거리면 들어주실까요?

덕경 : 사람이 달리 어린 양이겠냐? 다들 그래. 너만 그런 거 아니야. 급하니까 찾는 사람 많아. 부끄러워하지 마라. 앞으로의 행동이 중요한 거야. 니가 좋아하는 프란치스코인가? 그 교황이 말한 거 있자나. ‘하느님의 자비는 한계가 없다.’ 물론 난 처음부터 신실했으니까 동급 취급은 거절한다.




사람들을 잘 까서 ‘모두까기 인형’이라는 별명이 있는 덕경이 형. 형은 특히 나를 잘 깠었는데, 그 ‘깜’ 안에는 애정이 담겨 있어, 요즘 말로 욕쟁이 할머니 같은 느낌을 주었다. 『운수 좋은 날』에서 아픈 아내가 먹고 싶다던 설렁탕을 사기 우해 열심히 인력거를 끌던 김 첨지를 종종 생각나게 했다. 그렇게 지난 2년 간 나를 무척 챙겨주었던 송 첨지에게 나는 참 많이 의지했다.




동완 : 고마워요. 형. 진짜 고마워요.내가 진짜 형에게 얼마나 의존하는지 몰라요

덕경 : 좋은 말씀 한 구절이다.내가 수능 칠 때 응답받은 구절이야. 한 번 읽어 봐봐.그리고 일찍 자. 컨디션 좋아야 수술 잘 받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형이 건네 준 글귀를 계속 읽었다. 저 구절 속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에 새겨질 때까지.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다 사라지고, 이 말은 하나님과 나만이 알고 있는 둘 만의 비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소망도 곁들이며 열심히 읽었다. 그렇게 나는 생존본능을 기폭제 삼아 폭발하는 이기심을 가득 담은 기도를 속에서 서서히 잠들었다.




(10 떠날 준비 Ⅲ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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