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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18. 2016

[소설] 내려놓음 84 외출Ⅱ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84 외출Ⅱ




 2월말에 마지막으로 출근했던 지소. 이사하러 후딱 왔다간 것을 제외하면 거의 두 달 만이다. 운수면 보건지소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문을 열면 2층 관사로 가는 계단이 바로 보이고, 오른편에는 화장실, 왼편에는 진료시설과 대기실이 있다. 왼쪽으로 꺾어 짧은 복도를 지나가면 다시 좌측에는 여사님이 일하는 카운터, 승현이 형이 근무하던 의과진료실, 내가 진료하던 한의과진료실이 차례로 있고 반대로 우측에는 환자분들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들이 마련되어 있다. 그렇게 생긴 지소를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구경하시는 동안, 나는 한의과진료실로 들어갔다. 제대로 하지 못했던 작별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공부하려고 들고 왔지만 전시용이 되어버린 책들로 가득했던 책상

주치(主治)별로 약들을 정리해둔 약장.

가로로 나란히 위치한 베드 4개.


 의자에 앉아 베드를 보았다. 지난 2년 동안 늘 느낀 건데 할머니들의 친화력은 대단했다. 다 늙어간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처음 보는 사이라도 어느새 대화하고 계셨다. 침 맞고 누워있으면서 누가 더 많이 고생했는지 경쟁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커튼과 커튼으로 칸막이 쳐져 누구와 대화하는지도 모르는 채 열심히 입씨름하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 사이에서 열심히 장단 맞추고 있으면 오전이 금방 지나갔다. 그래 봤자 교통이 불편한 강촌이라 가끔 환자가 한 명도 없는 날도 있어 심심하기 그지없던 나에게 그건 일이기보다 재미였고 소소한 취미였다. 게다가 정이 많으신 분들이라 한바탕 떠들고 가면 의사선생님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면서 딸기나 참외, 수박 같은 과일을 싸다주어 꽤나 쏠쏠했다.


의사 생님 나이가 몇이고?
저 스물일곱이요.
하오 그거밖에 안 됐나. 어찌 공부 그리 잘했노.
그냥 어릴 때부터 한의사가 꿈이었어요.
애인은?
네?
여자친구 있나?
아니요. 왜? 따님 소개시켜줄라고?
딸은 무슨, 내 나이가 몇 인데.
아고 엄청 젊어보여서 50대인 줄 알았지.
내 나이가 이제 팔십인데 무슨.
에이 일흔다섯이네.


그기나 그기나. 여튼 내 손녀가 하나 있는데.
손녀는 몇 살인데요?
스물 서이든가 너이든가.
어리네. 할매 내 스물일곱이다.
네 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는데 좋지.
네 살인지 세 살인지는 어떻게 알고?
아마 맞을 기라.
그리고 아직 학생이겠구만. 내가 눈에 들어오겠나.
아이라 카이. 어디 회사 다닌다더라. 참, 맏이가?
네, 여동생 하나 있고.
에이 그람 파이다. 맏이는 안 돼.
맏이가 머 어때서?
제사 지낼라카믄 그거 고생인기라. 그냥 나많은 늙은이 주책이라카고 치아라.


 그 후로 그 할머니만 오면 ‘나 바람맞힌 분 왔나? 귀한 손녀 위한다고 나 차버리고 말이야. 삐져서 침 안 놓을란다.’ 라고 투정부리며 놀렸었다. 그나저나 그 에피소드가 갑자기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승현이 형과 베드에 나란히 누워 고민 상담했던 일. 연주 형과 밤새 추나학회 아카데미 실습 시험 준비했던 일. 고령에 있는 한의사 공보의 모두 모여서 다이어트 스터디 한 일. 많은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진료실에서 나와서 카운터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꺾어야 하는데 그 지점에는 인바디 기계가 하나 있다. 지역주민들의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들여놓은 기계였지만 주민들이 이용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대부분 내가 사용했었다. 작년 여름에 치아교정을 시작하면서 다이어트도 같이 했는데, 그때부터 화요일 아침마다 인바디 체크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조금이라도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 팬티 바람으로 내려가 측정할 때의 스릴은 꽤나 짜릿했다. 아침잠이 없으신 할머니들이 이른 시간부터 지소 문을 두드리는 경우도 있어 한 번은 계단 내려가다가 황급히 발길을 돌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카운터 바로 앞에는 신장체중계가 있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소변을 보고 계단을 어슬렁어슬렁 내려와 몸무게를 재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몸무게를 측정했다.

 ‘아 왜 이렇게 살이 안 빠져.’




85 외출Ⅲ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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