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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18. 2016

[소설] 내려놓음 83 외출Ⅰ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83 외출Ⅰ




 찜찜한 여러 증상들이 병의 악화가 아닌 방사선 치료로 인한 뇌부종 때문으로 밝혀지고, 생각보다 면역력이 잘 유지되고 있으니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교수님의 말을 듣자 ‘외출’에 대한 욕구가 내 마음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영화 《부당거래》의 명대사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줄 알아요.’ 처럼 병원에서 그토록 바라 마지않았던 일상생활도 계속되자 어느새 당연한 것이 되었고 더 큰 자극을 바라던 참이었다. 애초에 서른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이 방구석에 마냥 처박혀 있는 게 고역이 아닐 수 없는 법이다. 하루에 한 번 방사선 치료를 위해 집밖을 나서기는 했지만 그건 내가 온종일 못견뎌한 유폐의 일부일 뿐 어떠한 위안거리도 아니었다.


 방사선 종양학과 선생님과 면담이 있고 난 다음날, NS(신경외과) 교수님과 RO(방사선 종양학과) 선생님의 말씀에 힘입고 동네 까페로 길을 나섰다. 아직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감염에 대한 공포가 안겨주는 죄책감은 오히려 아슬아슬한 스릴감을 주어 마치 고등학생 시절 야자를 째고 PC방에 놀러갔던 그날의 흥분을 생각나게 했다. 그래도 아직 까페인은 꺼려져 레몬에이드를 주문하고 창가에 앉았다.


빈틈없이 공간을 채우는 건물의 연속.

푸른빛을 준비하는 가로수.

갓길을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 몇 대.


 병원 비상구 계단 창문을 통해 바라보았던 바깥세상과 배치만 약간 달리할 뿐 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그 거리를 걷는 사람들. 특권을 누리며 즐거움을 줄줄 흘리고 다니던 사람들이 무거운 현실에 짓눌려 활기(活氣)를 질질 흘리며 다니고 있었다.

 ‘같구나. 저 사람이나 나나 같네. 누군가에게는 취업으로, 누군가에게는 대출로, 누군가에게는 병마(病魔)로 나타나는. 형태만 다르지 본질은 같구나.’


 그 때의 청승이 사라지고 동질감이 대신 자리한다. 사실 바뀐 것은 없다. 바라보는 내 마음이 바뀌었을 뿐이다.

 주말이 되자 더 멀리 나가고 싶어졌다. 운전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인 어머니가 출근 안 하는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목적지는 이미 고령군 운수면으로 정해져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도 모르게 운수 타령을 하고 있었다. 늘 먹던 집밥이 지겨울 때면 ‘아, 운수에 있었으면’ 으로 시작해서 온갖 음식들에 대한 아쉬움을 토해내었다. 사실 수제비, 능이갈비찜, 청국장 정식, 오리구이, 보쌈 이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맛보다는 맛을 보던 그 시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으리라.

 그래서 운수로 가기를 꿈꾸었다. 운수에 놀러가는 상상만으로도 웃음 짓는 나. 그건 일요일에 로또 몇 게임사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꺼내서 당첨된 미래를 생각하며 위로 받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어머니는 미래를 상상하고 나는 과거를 회상했다는 정도가 아닐까?


 그렇게 해서 출발한 고령. 어제보다 더 큰 스릴과 해방감, 죄책감이 한데 어우러져 거대한 흥분이 나를 감싼다. 고령군 운수면, 그곳은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서려있는 곳이기에 그것은 소풍이 아니라 귀향(歸鄕)이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쾌감은 행복한 그 시간을 탐미하러 간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그 기쁨은 더 했다.



 30분 만에 도착한 운수보건지소. 내가 떠날 때 황량한 가지만 남아있던 입구의 거목은 나의 잃어버린 머리카락이 다 저기로 붙었나 싶을 정도로 찬란한 푸른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소 안으로 들어갔다.

 운수의 주인이 된 고희에게 미리 언질을 주긴 했지만 지금 하고 있는 짓이 분명 옳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래도 들어가고 싶었다. 급하게 이사하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행복들이 곳곳에 굴러다니고 있을 것만 같아 참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걱정했다.


이렇게 들어가도 되나?
고희에게 이야기 해두었어.
동완이가 괜찮대 자나. 잠시만 있다 나올 건데 머 어때.


 아버지가 편드는 틈을 타서 재빨리 문을 열었다.




84 외출Ⅱ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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