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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ug 04. 2017

현재 경주 최부자는 어떤 심정일까?

경상북도 경주시


교촌마을 골목

경주에 가면 볼거리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천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는 많지 않은데 그중 우리나라는 두 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와 백제와 조선 그리고 대한민국의 수도였던 서울입니다. 그래서인지 서울과 경주는 볼 것이 너무나 많은 여행하기 좋은 곳입니다.




최부자댁

경주에는 이천 년 전 신라의 모습만이 아니라 조선 시대 300년 12대에 걸쳐 사회 지도층으로서 모범이 되었던 경주 최씨 가문이 살고 있던 교촌마을이 있습니다.




최부자댁

교촌마을에 있는 최씨 고택은 1700년대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기도 합니다. 사대부로서 99칸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현재는 70년 큰 화재로 일부만 남아있습니다.


경주 최씨 일가는 조선 중기 최진립이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시작됩니다. 경주의 만석지기로 성장한 최씨 일가는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곡식을 갚지 못하면 담보 문서를 없애버리는 등 선행을 300년 넘게 베풀었습니다.




최부자댁 고목

이런 선행으로 지켜야 할 육훈이 내려져왔고 현재 최씨 고택에는 육훈이 적혀 방문하는 이들이 볼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2.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3.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4.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5.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6.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고즈넉한 담장과 문

이런 선행을 300년 12대에 걸쳐서 했으니 세계적으로도 보기 힘든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닐까 싶네요. 나 혼자만 올바른 일을 하기도 어려운데 12대에 걸쳐 선행을 했다는 것은 가정교육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주네요. 그래서인지 의적으로 칭하며 양반가들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던 활빈당도 경주 최씨는 건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택에 어울리는 항아리


경주 최씨의 마지막이 독립유공자 최준 선생입니다. 마지막이라고 해서 많은 재산을 탕진하며 선대에 뜻을 어긴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자금으로 재산을 내놓았고, 독립 이후에는 교육에 모든 재산을 기부하였기에 12대에 걸친 300년의 경주 최씨는 마감하게 된 것이죠. 경주 최씨의 마지막 최준 선생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 다시 하겠습니다.





최부자댁 곳간


앞에 보이는 건축물이 쌀을 보관하던 창고로 12대 300년 동안 한 번도 곳간에 쌀이 없던 적이 없습니다. 단순히 곡식을 모와 보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곳간 앞 쌀통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곳간 앞 작은 쌀통에 있는 쌀은 누구든 가져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곳간 앞 쌀독


그러나 쌀은 한 주먹만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쌀 한 주먹이면 한 가족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양으로 위급함을 모면함이지 남에게 의존하려는 태도나 욕심을 많이 가지려는 태도를 지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마을 사람들과 최씨 일가에게 지혜를 가르쳤던 현명함을 볼 수 있네요.




교동 법주


최씨 고택 옆으로 교동 법주가 있습니다. 교동 법주는 조선 숙종 때 궁중에서 음식을 담당했던 최국선이 빚은 것에서 유래하는데 현재 국가무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으며 최국선의 10 세손이 가업을 잇고 있습니다.




교동 법주 정원


저는 술의 진미를 느낄 수 없는 몸이기에 술맛보다는 아름다운 정원과 고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고즈넉하면서도 귀품이 서려있는 모습은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에게도 느껴지는지 카메라에 담기 위해 많은 분들이 셔터를 누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담장을 끼고도는 교촌마을

교촌의 한가로운 담장 아래의 길을 걸으면서 최씨 부자의 마지막 최준 선생과 영남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최준 선생은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는 신념으로 안희제를 도와 백산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합니다. 독립 후에는 남은 재산을 교육에 투자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일조하기로 결심하고 경북지역의 지주들을 모아서 대구대를 설립하게 됩니다. 대구대에 최씨 일가의 남은 재산과 더불어 많은 고문서와 자료를 기증하였습니다.




독립 후손의 집

대구대가 잘 운영되다가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입이 있고나서부터였습니다. 대구대가 반강제적으로 영남대로 바뀌는 과정 속에서 당시의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의 이권이 개입되게 됩니다. 민족교육을 위해 모든 재산을 기부했던 경주 최씨의 마지막 최준 선생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고택에 잘 어울리는 한복


최근 우리를 분노케 한 박근혜 대통령과 관련이 깊은 최태민이 영남대에 깊이 관여하게 됩니다. 영남대의 많은 재산이 빼돌려지고 세탁되어서 정치자금으로 많이 흘러들어간 사실이 언론을 통해 많이 나오고 있죠. 최태민은 의붓아들 조순제를 통해서 차명으로 영남대 소유의 땅을 쪼개기로 팔아서 자신의 재산으로 만들어버렸죠. 박근혜 전 대통령과 관련해서 수많은 잡음이 생겼냐고 의혹이 생겼음에도 무엇하나 밝히지 못하고 덮혀져 갔고, 오늘날까지도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안타까움을 가져오게 합니다.





경주 교촌마을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교촌마을의 최씨 고택에 대하여 영남학원(영남대)측이 2014년부터 소유권을 주장하며 최씨 후손들에게 임대료를 내라고 종용한 것입니다. 2014년이면 지금 이야기가 아닌 것이죠. 그런데 이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작년 11월 정도로 기억합니다. 즉, 박근혜 퇴진을 주장이 나오면서 감추어두고자 했던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경주 최씨의 최준 선생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선조들이 이루어놓은 모든 재산과 정신을 환원했는데 이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요? 최씨 후손은 왜 임대료를 지불해야 하는 채무자가 되어야 하고 선조들의 육훈이 올바른 것인지 되물어보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경주 최씨의 후손과 선조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어떤 회환에 잠겨있을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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