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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Nov 05. 2017

가을에 꼭 가봐야 할 풍수원 성당

강원도 횡성군

                     

강원도 횡성에 위치한 풍수원 성당


강원도 횡성으로 놀러 가는 경우보다는 영동으로 가기 위해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강원도 횡성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볼 것이 많은 지역입니다. 친구와 함께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 위해 횡성을 방문하면서 가장 아름다웠던 장소를 뽑으라면 풍수원 성당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풍수원 성당 주차장


풍수원 성당의 주차장은 널찍하여서 많은 차량이 주차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차장 한편에서 할머니들이 산나물을 펼쳐놓고 외지인들에게 파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전통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을 풍수원 성당 주차장에서 마주하면서 놀라기는 했지만 할머니들로부터 정겨움이 묻어나는 풍경이었습니다.





가을의 색과 어우러진 풍수원 성당


풍수원 성당을 바라보는 순간 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진 모습에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짙게 물든 단풍에 물이 든 듯 풍수원 성당 외벽도 짙은 단풍으로 변하여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많은 곳을 다녀보지는 않았지만 가을에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꼽으라면 저는 풍수원 성당을 1순위로 올리고 싶습니다. 특히 가을 단풍을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스쳐 지나듯 보지 않고 한적하고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단풍으로 유명한 장소는 대부분 많은 인파로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어려움이 있지만 풍수원 성당은 오롯이 가을이 주는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는 방문객들


가을에 물든 풍수원 성당의 전경을 모두 담을 수 있는 포토존이 따로 있었습니다. 친구와 성당 부근을 돌아다니며 여러 각도로 촬영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제 손을 잡고 맨솔 위로 데려가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고 이곳에서 찍으면 최고로 멋진 사진이 나와.' 

이 말을 듣고 스마트폰 카메라 앱을 여는 순간 성당과 함께 커다란 단풍나무가 카메라 프레임 속에 다 들어왔습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촬영을 해도 성당을 모두 담을 수 없었는데 아저씨 덕분에 모두 담을 수 있게 되어 연신 아저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 했습니다.






풍수원 성당 내부


풍수원 성당의 내부는 화려하지 않지만 부족함도 없고, 간결하면서도 성스러움이 묻어나는 고풍스러운 공간이었습니다. 오늘날 화려하고 웅장한 규모의 교회가 늘어나고 있는 모습과 비교되었습니다. 최근 제가 살고 있는 지역에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웅장한 교회 건물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올리며 하나님과 만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유럽의 중세가 끝나가는 시점 추락하는 교황과 교회가 높은 첨탑의 큰 교회를 올리며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던 역사가 떠오릅니다. 교회를 세우는데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강제로 판매하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한 결과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사실이 떠오르는 것이 과한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겉모습만 화려 해지는 행태를 부정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작은 것 하나하나 고풍스러운 성당


풍수원 성당을 보면서 거대화되는 교회와 비교하게 된 데에는 풍수원 성당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풍수원 성당은 강원도 최초로 세워진 성당이며, 우리나라에서는 4번째로 설립된 성당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오래된 성당이지만 초기에 건립되었던 신앙심을 잊지 않기 위해 초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풍수원 성당을 아름답고 고풍스럽게 보여주는 벽돌은 100여 년 전 이곳에 있는 신도들이 직접 구워 만든 것으로 의미가 다릅니다. 내가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만든 물건이 완제품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 것처럼 풍수원 성당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건립했기에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손 때가 묻어 더욱 가치 있어 보이는 풍금


풍수원 성당을 건축하는데 이런 심혈을 기울인 데에는 구한말 천주교 박해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정조대왕 시절 상대적으로 종교적 자유를 누리고 있던 천주교는 1800년대 들어서면서 엄청난 박해를 받기 시작합니다. 박해를 받은 이유로는 조선을 운영했던 성리학 질서에 벗어나 신분제를 부정하고 제사를 거부하는 측면도 있지만, 더 큰 이유로 정치세력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정조를 지지하던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천주교 박해가 이루어지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801년 일어난 신유박해입니다.





정성 들여 구워낸 벽돌로 지어진 풍수원 성당


신유박해 당시 용인지역에 살던 4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하고자 신태보(베드로)를 중심으로 팔일 동안 피난처를 헤매다가 관군의 눈을 피할 수 있는 풍수원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들은 종교의 자유가 박탈된 세도정치 기간 동안 관군에 발각되면 언제라도 죽어야 하는 위험부담을 가지고도 자신들의 신앙을 버리지 않고 지켰습니다. 풍수원에 정착하여 산을 개간하며 어려운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자신들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며 이어갔습니다. 


크리스트교는 성직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계서제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 하나님을 섬기는 사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풍수원에 정착했던 신도들은 성직자를 모실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성직자 없이 80여 년간 공동체를 유지합니다. 






풍수원 성당 뒤편의 은행나무


80여 년을 신도들의 신앙만을 가지고 자치적으로 운영되던 이곳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1888년입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천주교는 종교의 자유를 되찾게 됩니다. 또한 천주교를 세계에 전파하는데 앞장서던 프랑스와 1886년 조약을 맺으면서 풍수원에도 성직자를 맞이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됩니다. 풍수원에 있던 신자들의 오랜 종교활동이 인정받으면서 프랑스인 르메르 신부가 풍수원으로 부임하여 정식으로 교회가 설립되게 됩니다.





성당과 나이가 같은 아름드리나무


르메르 신부가 1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을 당시에는 제대로 된 성당을 갖출 여력이 없었지만 1896년 2대 주임으로 정규하(아우구스띠노)신부가 부임하면서 변화가 시작되기 시작합니다. 정규하 신부는 중국인 기술자 진 베드로와 함께 성당을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05년에 성당 설립을 위한 착공을 시작합니다. 많은 물자가 부족하고 성당을 지어본 경험도 부족했지만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벽돌을 굽고 나르며 2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1907년 풍수원 성당이 준공하게 됩니다. 이로써 풍수원 성당은 우리나라 최초로 한국인 신부가 지은 성당이며, 신도들이 성금만 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땀을 흘리며 쌓아 올렸다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사진에서 우측에 보이는 두 아름드리나무도 성당이 지어질 때 함께 심은 나무로 오랜 세월 풍수원 성당과 함께하면서 이제는 성당의 일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풍수원 성당 뒤편


풍수원 성당은 높은 탑과 큰 유리창이 특색인 고딕 양식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중세 교회의 권위가 높았던 시기에 고딕 양식의 교회건물이 많이 세워집니다. 아마도 풍수원 성당을 건립하면서 한국에서도 천주교의 권위가 높아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성모 마리아상과 앞에 놓인 의자


성당 뒤편에는 성모 마리아상과 함께 사람들이 앉아 기도할 수 있도록 의자 세 개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공간에 한국의 정서를 잘 담아내고 있다는 느꼈습니다. 한국의 문화는 곡선입니다. 물이 흐르듯 원만하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곡선은 우리의 물건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듯이 우리의 정서를 설명하기 가장 좋은 단어이기도 합니다. 서양을 대표하는 건축물인 성당은 직선의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세워진 성당에는 우리의 정서가 반영되어 직선보다 곡선을 더 많이 수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909 천주당'


개인적으로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종교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의미를 이해하고 존중합니다. 내가 믿지 않는 종교라고 해서 배척하거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종교 기관을 방문하더라고 기도를 올립니다. 그것이 방문을 허락해준 분들에게 마땅히 차려야 할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풍수원 성당에서도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고 안전한 여행이 되도록 도와준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의 기도를 하고 돌아서려고 하는 순간 우측 하단의 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1909년에 이곳에 천주당이 만들어졌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산을 보면서 다시 한번 감사드렸습니다. 만약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면 소중한 유산을 볼 기회를 놓칠 뻔했습니다. 





구 사제관


풍수원 성당 뒤편으로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구 사제관이 보입니다. 1912년 지하 1층, 지상 2층의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과거에는 사제들이 사용하던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유물전시관으로 운영되어 성당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개방해놓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건축물일 수도 있으나 구 사제관도 100년이 넘는 소중한 유산입니다.





나무로 된 계단과 책상


구 사제관에 들어서며 마주하게 된 나무 복도와 계단은 오랜 세월 사람의 손길에 번들거리며 우아한 자태를 뽐냈습니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복도와 계단에서 고풍스럽게 울려 퍼지는 소리는 마음속에 있던 어린 시절의 향수를 끄집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조심히 다루라는 묵직한 소리로도 다가왔습니다. 또한 오래된 책상의 서랍을 열 때의 스르르 거리는 소리는 귀를 황홀하게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기나긴 시간 동안 사람과 지내온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옛 성경책 
밭에서 발견된 예수 상


유물전시관에는 풍수원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200년 동안 함께 했던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글로 된 옛 성경책에서부터 근처 밭에서 발견되어 제작년대를 알 수 없는 예수상까지 전시되어 있습니다. 천주교와 관련된 유물로서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글의 변천사와 향토사적 가치도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유물일수록 가치가 높은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두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쉽게 쓰고 버리는 오늘날의 풍토 속에서 풍수원 성당이 가지는 또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풍수원 교회 교적


우리나라의 강점 중의 하나가 기록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사심이 들어가지 않은 공정함으로 오랜 역사를 기록했음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기록을 남기는 문화는 우리들의 DNA에 흐르고 있는가 봅니다. 풍수원 교회 교적을 훑어보던 중 1915, 1924년생 교인들의 이름을 보면서 역사와 전통은 이렇게 만들어짐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풍수원 성당의 유물전시관에서 제일 좋았던 점은 오감을 통해 과거와 만날 수 있었던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박물관에 가면 유리창 너머로 유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반면 이곳에서는 소리, 후각, 시각, 촉각을 통해 과거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유물전시관


200년 전 천주교 신자들이 풍수원에 정착하면서 논과 밭을 개간하고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사용되던 옛 물건들을 수집하고 전시해놓은 유물전시관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최근에는 사용되지 않는 일상 도구들을 보존하고 전시해놓았다는 점에서 유물전시관의 가치를 인정하고 싶습니다.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도구


유물전시관에 있는 도구들은 거창하지도 않으며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우리의 물건들을 기록하고 알려주는 특별한 박물관으로 보였습니다. 다른 박물관에서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물건을 전시해놓은 곳은 많지만 이름과 사용법을 적어둔 곳은 많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도구들의 이름과 사용방법이 설명되어 있어서 한층 더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고구마 껍질을 벗기는 기구, 옥수수 알을 터는 기구 등 전문화된 기구들을 처음 보면서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낟알을 터는 기구도 어떤 작물이냐에 따라 다르게 제작되어 사용하였다는 것을 이곳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최근 껍질 벗기는 기계를 접하면서 세상 좋아졌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던 것이 제가 무지하기에 가능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유물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역사교사로 많이 부족함을 느끼며, 앞으로 배우고 익힐 것이 너무나 많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유물전시관 옥상을 가득 메운 항아리


유물전시관 옥상에는 수많은 항아리들로 가득 메워져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경복궁 장고가 떠올랐습니다. 경복궁 장고에 가면 전국 팔도의 항아리를 모두 볼 수 있듯이 이곳에도 일상생활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항아리가 그득했습니다. 항아리들 너머로 복원된 풍수원 역원이 보입니다. 예전에 이곳에는 강릉으로 넘어가기 전 관리들과 말이 쉴 수 있도록 역원이 있어서 이를 바탕으로 역원을 복원해 놓고 있습니다.




풍수원 성당 벽돌을 구워내던 가마터


복원시켜놓은 역원 옆으로 100여 년 전 풍수원 성당을 짓기 위해 벽돌을 굽던 가마터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가마터에서 벽돌을 구워내는 것을 관리 감독했던 것은 중국 기술자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황토에 짚을 섞어 집을 짓기에 벽돌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반면 중국의 경우 벽돌로 건축하는 기술이 예전부터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풍수원 성당만이 아니라 1900년대 전후로 지어진 건축물들은 대부분 중국 기술자들이 지은 것이 많습니다.





복원된 풍수원 역원


복원된 역원의 실내는 소박하면서도 정갈했습니다. 이곳에 앉아 방문 너머를 내려다보면 풍수원 성당과 함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산들이 눈 안에 들어옵니다. 그 풍경이 가히 장관이며, 이곳으로 사람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든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풍수원이란 지명은 항상 물이 많이 흐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산세에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쉽게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산계곡으로 흘러내린 물이 모이는 이곳은 박해를 피해 머물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야외 정원 및 쉼터

풍수원성당에는 문화해설사 여러분이 계셔서 설명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십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성당과 주변을 둘러본다면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여행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성모 마리아상


정원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은 다른 성당에서 보던 마리아보다 훨씬 친근했습니다. 자연과 어우러져서인지, 아니면 성모 마리아를 꽃으로 치장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밝고 따뜻한 모습으로 편안함을 주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성모 마리아에 밟혀있는 뱀(사탄)이 힘을 쓰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듯 보였습니다. 




측면에서 바라본 풍수원 성당


역원을 거쳐 풍수원 성당으로 내려오는 길에 바라본 풍수원 성당의 모습은 정면에서 보았던 모습과 또 달랐습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성당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풍수원 성당은 으뜸을 차지할 정도로 빼어난 경관과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장소는 많지만 오붓하게 천천히 가을의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횡성에 위치하고 있는 풍수원 성당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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