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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16. 2017

평생의 짝을 만나게 해준다는 백불이 계신 옥천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옥천암 일주문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 있는 옥천암을 웹툰 만화를 통해 알게 되면서 방문했습니다. 옥천암은 규모로 보면 작은 사찰이지만 우리나라 4대 관음기도 도량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삼각산과 인왕산 경계에 있는 옥천암은 '보도각 백불'로 예전부터 유명한 사찰이지만 옥천암을 창건한 사람과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보도각 백불


그러나 옥천암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서울을 도읍을 정할 때 이곳에 와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성계가 옥천암에 와서 기도를 하고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것은 이성계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무학대사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무학대사가 왕십리에 도읍을 정하고자 했을 때 선인이 나타나 서쪽으로 10리를 더 가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왕십리 지명이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왕이 있을 곳은 십리를 더 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왕십리 지명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봤을 때 이성계는 서울로 도읍을 선정하는 데 있어 부처님의 도움이 있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조선이 영원히 번창하기를 바라면서 이곳에 와서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흔히 볼 수 없는 보도각 백불


흥선대원군의 아내이자 고종의 어머니였던 부대부인도 이곳에 와서 고종을 위해 많은 기도를 올렸습니다. 당시 최고의 권력자의 아내가 이곳에 와서 기도를 드렸으니 작은 사찰에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명성황후의 명으로 관음전을 지은 것을 봐서도 옥천암은 조선 왕실과 오랫동안 깊은 연관이 있는 사찰입니다.






옆에서 바라본 보도각 백불


보도각 또는 해수관음이라 불리는 백불의 옆모습은 앞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느낌을 줍니다. 앞에서 볼 때에는 관음보살의 입체감을 느낄 수 있지만 옆에서 바라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튀어나온 바위인 줄 알았는데 안쪽으로 휘어진 바위였다니. 보도각 백불이 있는 바위가 착시현상을 일으키기에 옥천암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신비감이 주면서 기이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나 봅니다.


백불의 또 다른 특이한 점이 부처님이 관모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관모는 벼슬아치들이 쓰는 모자로 대부분의 사찰에서 모시는 관음보살은 이런 모양의 관모를 쓰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조선이 억불정책을 펴면서 부처도 왕의 아래에서 통제받을 수 있음을 표현한 것인지 모르겠네요.






보도각 백불 뒤에서 기도를 올리는 신자


백불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져옵니다. 순조 때에 나무를 팔아 생계를 근근이 이어가던 윤덕삼이란 젊은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하문을 넘어 나무를 팔러 다니던 가난한 윤덕삼은 늘 이곳에 와서 기도를 했습니다. 예쁜 여자를 만나 자식도 많이 낳고, 돈도 많이 벌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입니다. 100일을 기도했을 무렵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 말하기를 내일 새벽 자하문에 가서 첫 번째로 나오는 여자와 결혼을 하면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냇가를 건너에서 바라본 보도각 백불


꿈을 깨자마자 윤덕삼은 밥 한 숟가락도 뜨지 않은 채 부리나케 자하문으로 달려갔습니다. 자하문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 밖으로 나오는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윤덕삼은 여인에게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이야기하자 여인도 매우 놀라며 자신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꿈속에서 자하문에 나가면 윤씨 성을 가진 남자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그 남자와 혼인하여 살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둘은 부처님이 자신들을 만나게 해 주었음을 깨닫고 백불에 와서 예를 올리며 결혼을 합니다. 여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패물을 팔아 근처의 산과 논을 사서 윤덕삼과 함께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얼마 뒤 둘은 큰 부자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옥천암의 기와


옥천암을 방문하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옥천암 앞을 흐르는 홍제천이 지금은 맑은 물이 흐르지 않는 하천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옥같이 깨끗한 물 옆에 위치하고 있어 사찰 이름도 옥천암이라 명명한 것인데 현재는 백불만이 깨끗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아쉬움이 커져만 갑니다. 100년 전 맑고 투명한 물이 흐르던 곳에 위치한 옥천암은 분명 멋진 경관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옥천암을 밑에서 바라본 전경


조선시대 옥천암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서울에 드나들던 많은 사람들이 흐르는 냇물에 발을 담그고 휴식을 취한 후 마애불에게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지 않았을까요.






법고와 목어


옥천암을 들르지 않더라도 사찰에서 들리는 법고소리와 목어 소리를 들으며 하루 동안 별 탈 없기를 기도하거나 감사하며 서울을 드나들었을 것입니다. 






극락전


저는 특정 종교를 믿고 있지는 않지만 종교가 가진 힘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조선 시대 억불정책으로 많이 쇠락해갔지만 끊임없이 민중들의 어려운 삶을 대변해주며 그들을 어루만져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삶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불어넣기도 했습니다.


비단 백성들만 불교를 믿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 불교를 국가적으로는 억압했으나 500년 동안 왕실에서는 불교행사를 통해 왕실의 번영을 기원했으니까요.

 





옥천암 내의 쉼터


명성황후 명으로 관음전이 건립되고 중흥된 옥천암도 그런 의미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까 이야기했던 윤덕삼이란 젊은이의 이야기도 고단한 삶 속에서 희망을 찾고자 하는 민중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삶이 변화되지 않을 때 종교에 많이 의지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니까요.





옥천암의 전체적인 전경


옥천암을 방문하면서 바라는 점이 하나 있다면 옥천암을 휘돌아가는 홍제천 물이 깨끗해져서 서울 시민들이 언제든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휴식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웹툰을 통해 옥천암을 알고 방문하면서 서울 구석구석에 참으로 많은 볼거리와 이야기가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곳곳에 가봐야 할 곳이 많다는 것에 행복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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