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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13. 2017

천자를 만들 수 있는 명당 남연군 묘

충청남도 예산군

       

남연군 묘 전경


국사 교과서에 남연군묘에 대한 설명을 혹시 기억하고 계시나요? 독일 상인이었던 오페르트가 조선과의 통상을 위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도망쳤고, 이에 화가 난 흥선대원군은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며 서양과의 교역을 금지시켰다고 배웠죠.







남연군 묘를 알리는 표지석


그럼 남연군이 누구냐? 남연군은 정조의 아들이었던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 훗날 고종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남연군이 살던 시기는 세도정치 기간으로 조선의 왕족들은 큰 힘을 쓰지 못하던 시기였죠. 흥선대원군이 아니었다면 남연군의 묘는 예산이 아닌 연천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역사의 뒷칸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남연군의 아들이었던 흥선대원군은 외척으로부터 왕권을 강화시켜 강력한 조선을 만들고자 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왕족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 집안에서 왕이 나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이 가장 먼저 행한 것이 연천에 있던 아버지 묘를 예산으로 이장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명했던 지관이 흥선대원군에게 두 명의 천자가 나오는 자리와 후손 대대로 영화를 누리는 자리 두 개가 있는데 어느 곳을 선택하겠냐고 물어봤습니다. 이 질문에 흥선대원군은 주저 없이 두 명의 천자가 나오는 자리를 선택했습니다. 지관이 알려준 두 명의 천자를 배출할 수 있는 명당이 충남 예산 가야산에 위치하고 있는 현재 남연군 묘자리입니다.




남연군 묘에 올라서서 바라본 모습


그런데 문제는 지관이 알려준 자리에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99개의 암자를 가진 가야사라는 큰 사찰이 있었다는 거죠.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내쫓기 위해 자기 재산의 절반인 만 냥을 주지에게 주면서 쫓아냈다고도 하고 또 다른 이야기로는 충청감사에게 중국의 명품 벼루를 주면서 공권력을 동원해 가야사를 쫓아냈다고도 합니다. 만약 후자의 이야기가 맞다면 조선시대 동안 불교가 억압받던 시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가야사 사찰 터


현재 남연군묘에는 가야사 터를 발굴하여 사찰의 흔적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야사에 따르면 가야사를 허물자 흥선대원군의 형제들이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남연군 능을 이곳에 옮기면 형제 모두 죽게 될 것이라 경고를 하자 다른 형제들은 겁을 먹으며 묘의 이장을 반대했으나 흥선대원군만은 오히려 '이곳이 명당이긴 명당이구나'라며 좋아했다고 합니다. 


또한 가야사에 있던 탑을 부수자 밑에 커다란 바위가 나와 능을 조성하기 힘들어 공사가 중단이 되었습니다. 이에 흥선대원군이 '나라고 왕의 아버지가 되지 말란 법이 있느냐?'라고 소리치며 도끼로 내리치자 바위가 깨져 능을 조성할 수 있었다고도 합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흥선대원군이 강단 있는 인물이며,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자 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남연군 묘를 옮긴 상여를 보관하는 장소


연천에서 예산까지 남연군의 묘를 옮기는데 필요한 거리가 500리 길입니다. 500리는 200km에 달하는 거리이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큰 역사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실 종친의 묘였기에 흥선대원군은 상여가 지나는 고을마다 사람들을 동원해서 상여를 들게 했습니다. 남연군의 묘를 옮기는데 동원된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됩니다.






남연군 상여 모조품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왕실 종친의 묘를 옮길 수 있는 중요한 일을 맡았다는 기쁨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권력자들에 의해 주민들이 좋아했다고 포장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구간인 광천리 남은들 주민들이 다른 어떠한 곳보다도 남연군의 상여를 극진히 모셨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흥선대원군은 상여를 마을에 주었고 이후 이 상여는 마을의 보물로 여겨지며 남은들 상여로 불렸습니다. 현재 이곳에 있던 남은들 상여는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고 여기에 있는 것은 복제품으로 진품을 보기 위해서는 서울로 가야 합니다.






남연군 묘


1845년 이곳으로 남연군묘를 이장하면서 흥선대원군은 걱정이 하나 생겼습니다. 천자가 나올 자리이기에 아버지의 묘가 도굴되는 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도굴을 막기 위해 수만 근의 철을 부어 묘를 조성했다 하니 흥선대원군의 집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네요.


그 집념을 권력욕이라고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기울어져가는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남연군 묘를 이장한 후 흥선대원군의 바람대로 1863년 둘째 아이가 왕위에 즉위하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조선의 왕이 된 분이 바로 고종입니다.






남연군 묘 뒤에서 바라본 가야산


풍수지리를 잘 모르기에 남연군 묘지 터가 얼마나 좋은 기운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남연군 묘에는 햇볕이 잘 들고 뒤로는 산이 찬 바람을 막아주며 앞으로는 기운이 뻗어나갈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 있으니 명당이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넘겨짚어봅니다.





남연군 묘 주변의 바위


천자가 2대에 걸쳐서 나올 것이라는 지관의 예언은 맞았지만 그로 인해 나라가 무너짐은 알지 못했는가 봅니다. 아니면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이런 옛이야기 들은 과학적으로 근거는 없지만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역사 속에서 나오게 된 우리들의 아쉬움은 아닐까요?


역사는 더 많이 흘러 남연군 묘가 있는 곳은 현재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둘레길이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가야산 둘레길을 걸으면서 남연군 묘를 방문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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