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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12. 2017

추사 김정희의 마지막 쉼터 과지초당

경기도 과천시

                  


추사 박물관 전경


추사 김정희를 기억하고 그 뜻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전국 곳곳에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추사 김정희가 태어난 예산 추사고택, 9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제주도, 그리고 마지막 여생을 마무리했던 과지초당을 둘러보면 추사 김정희 선생의 일생을 모두 경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다녀온 곳은 추사 김정희가 생을 마무리했던 과천에 위치한 과지초당과 추사박물관입니다.





추사 박물관을 알리는 표석

 

추사 김정희는 19세기를 대변하는 조선의 지식인이자 세도정치하에서 올바른 뜻을 펴지 못했던 시대상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많은 저서와 작품들을 우리에게 남기며 후대에 기억되는 대표적인 조선 후기의 인물로 오늘날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19세기 세도정치하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거나 나쁜 이미지로 남아있는 권력자들과 비교할 때 역사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과지초당은 입장료가 있으나  다둥이카드가 있으면 무료로 박물관을 이용할 수 있으니 방문하시는 분들은 참고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


추사 김정희는 태어날 때부터 기이함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24개월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올 때 집 주변에 말라가던 나무들이 생기를 찾아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추사 김정희는 당시 명문가의 집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없는 유년기를 보내며 많은 학문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당시 채제공이란 인물이 어린 김정희의 필체를 보고 놀랄 정도로 뛰어난 자질은 널리 알려져 세간에 큰 관심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기에 위대한 스승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조선 후기 실학의 큰 거두였던 박제가로부터 학문을 배우며 타고난 자질을 더욱 발전시키게 됩니다.





추사 기문 탁본


하지만 행복했던 유년시절이 지나고 10대에 들어서자 큰 아픔을 연달아 겪게 됩니다. 15살에 혼인을 한 후 1년 만에 어머니가 돌아갑니다. 20살에는 아내와 사별하였으며,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스승이었던 박제가도 죽으면서 할아버지, 양아버지(큰아버지), 어머니, 아내, 스승마저 모두 떠나보내게 됩니다. 이런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서였는지 몰라도 추사 김정희는 학문에 대한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추사박물관 내부


열심히 공부한 노력의 대가로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합니다. 사마시에 합격한 김정희는 호조참판에 오른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북경에 따라가게 되면서 당시 유명한 청나라 학자들을 만나 교류를 하게 됩니다. 금석학의 대가였던  옹방강과 완원 등 당대 석학들과 학문을 교류하며 고증학을 익히게 됩니다. 이때 김정희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청나라의 학자들 모두 김정희와의 헤어짐을 아쉬어했다고 하네요. 다시 생각해보면 23살의 젊은이가 세계적인 지식인들과 학문을 교류하고 능력을 인정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모조품


금석학을 배운 김정희의 업적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를 밝혀낸 것입니다. 19세기까지 진흥왕 순수비를 무학대사가 세운 비석이나 글자 없는 보잘것없는 비석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던 것을 1400년 전에 한강 하류가 신라의 영토임을 알리는 순수비였음을 알아낸 것이 추사 김정희였습니다. 순수비의 발견은 우리의 고대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역사 속에서 아주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박물관 내 추사 글씨체


추사 김정희는 34세 과거에 급제하여 아버지인 김노경을 통해 배운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여 세상을 바꾸려 해 보지만 아버지인 김노경이 1830년 탄핵당하면서 뜻을 접게 됩니다. 아버지와 함께 김정희 선생도 관직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병조참판으로 정계에 입문하지만 안동 김씨에 의해 제주도로 9년 동안의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세도정치 하에서 관직으로의 진출이 늦었고 활동도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세한도


제주도 유배 시 추사 김정희는 여러 울분과 한을 학문과 예술로 승화를 시킵니다. 제주도 유배 시기에 추사체가 완성되고 유명한 세한도라는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세한도에는 “날이 차가워진 연휴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글을 발문에 적어 놓았습니다. 단순한 그림 같아 보이지만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의 삶과 학문을 이해했을 때 '아~'라는 감탄사가 나온다고 합니다. 아직 저는 이해가 부족해서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품으로만 기억되네요.






추사박물관


추사체가 만들어지기까지 추사 김정희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 "벼루 열개, 붓 천 자루"를 썼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벼루를 6년 동안 갈았지만 벼루의 모양이 변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려보니 얼마나 글을 써야 가능한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네요.






추사 김정희 서체 전시


김정희와 동시대에 살던 유최진의 '초산잡저'에 보면 추사체에 대해 이렇게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추사의 예서나 해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깨달은 서예가는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으나 거기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 글이 추사체가 왜 명필인지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글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박물관내 체험실


박물관은 총 3층으로 지하 1층에는 체험실과 간단한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이 있으며 지상 1,2층에는 김정희 선생의 여러 작품과 생애를 접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으니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과지초당


박물관 앞에는 복원된 과지초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생부인 김노경이 지은 별서로 이곳에서 아버지인 김노경의 삼년상을 치릅니다. 훗날 추사 김정희도 이곳에서 인생을 마무리짓는 곳이기도 합니다.





과지초당 


많은 풍파를 겪었던 추사 김정희는 4년 동안 이곳에서 머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명문가의 집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세도정치하에서 제주도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다니며 고진 풍파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시련을 이겨내며 승화시킨 많은 작품과 학문을 후대에 전한 김정희는 스스로 자신의 삶에 어떠한 평가를 내리며 생을 마감했을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과지초당과 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는 1856년 7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추사 김정희를 이야기할 때 학문과 서체만을 주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추사 김정희의 삶 속에서 세도정치의 혼란한 사회 속에서 당대 지식인들의 겪었을 고뇌와 고충을 가지고 역사를 풀이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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