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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11. 2017

가장 많은 상처를 입은 경희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정문


오늘은 5대 법궁 중 가장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경희궁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에는 몇 명의 중국인 가족들이 이곳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제가 경희궁을 둘러보는 동안 한국인 커플을 제외하고는 파란 눈의 외국인과 중국인들만이 이곳을 방문하여 관람하더라고요.






숭정전


한국인 중에서도 경희궁에 대해 알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경희궁에서 어떠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기에 경희궁을 찾는 이도 적습니다. 우리보다 외국인들이 경희궁을 더 많이 찾아오는 것에 대해 밀려오는 창피함과 동시에 잊혀 가는 우리의 것에 대한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초라해진 경희궁을 어떠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느끼며 갔을지 궁금해지네요. 경희궁 궁터가 축소되는 가운데 전각들은 이곳저곳에 팔려 다른 법궁과는 다르게 규모가 매우 작습니다. 외국인들이 경희궁이 축소된 이유를 모른 채 경희궁을 보고 자신들의 나라로 간다면 많은 오해와 편견을 낳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숭정전


경희궁의 역사를 보면 광해군이 1623년 완공되어 경덕궁으로 불리다가 영조 재위 시절인 1760년부터 경희궁으로 불렸습니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많은 왕들이 이곳에서 지내면서 조선 후기의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흥선대원군의 집권 시기 경복궁 중건에 경희궁의 전각이 쓰이고 궁궐로서의 기능이 많이 약화되 었지만 경희궁의 마지막은 일제에 의해서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숭정전, 흥화문 등이 뜯겨 팔리면서 경희궁은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후 이곳에 서울 고등학교가 세워져 있다가 2002년에 들어서야 경희궁 복원공사를 통해 우리에게 경희궁으로 다가올 수 있었던 비운의 궁궐입니다.





경희궁의 옛 모습


위의 사진이 바로 경희궁의 옛 모습입니다. 그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수많은 전각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궁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경희궁의 모습과 비교해볼 때 우리에게 안타까움을 줍니다.





숭정전


경희궁은 서궐이라 불리던 곳으로 동쪽의 창덕궁, 창경궁(동궐)과 마주 보는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머릿속에서 그려본다면 서궐의 규모가 동궐과 비슷할 정도로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경희궁에는 정전이었던 숭정전과 자정전 외에도 융복전, 회상전이라는 두 개의 침전과 함께 수많은 전각들로 가득했다고 하니 그 규모와 웅장함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숭정전


숭정전은 광해군 10년(1618년)에 건립된 정전으로 조회가 열리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행사가 열리던 곳입니다. 그리고 27명의 조선의 왕 중에서 경종, 정조, 헌종 세분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현재 경희궁에 있는 숭정전은 옛 것이 아니라 복원된 것입니다. 실제의 숭정전 건물은 일본 사찰에 팔렸다가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남아있습니다.






숭정전에서 바라본 숭정문


숭정전에서 바라본 전경은 덕수궁에서 시청의 높은 건물들을 보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가장 큰 건축물이었던 궁궐이 이제는 가장 낮은 자세로 높은 빌딩에 둘러싸여 복잡한 현대인에게 휴식을 안겨주는 공원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음에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숭정전 잡상


현재의 경희궁 터에는 서울역사박물관과 서울시교육청이 자리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과거의 경희궁은 서울역사박물관을 통해 기억되고, 조선의 앞날을 고민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 했던 고뇌들은 서울시 교육청에 이어져 인재 양성으로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비록 경희궁은 온전한 모습으로 존재하지는 못하지만 역사의 뒤로 물러나면서 그 역할을 나누어 준 것에 위안을 삼아봅니다.






자경전 회랑


자경전의 회랑을 바라보면서 왠지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졌습니다. 왜 이런 느낌을 받는지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을 해보니 조선시대에는 길게 뻗어나갔을 회랑이 이렇게 가로막혀 제한된 공간 속에 머물러 있음에 원인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막혀버린 회랑에서 나라를 잃어버린 아픔을 보게 됩니다.






자정전


자정전은 1617년에서 20년(광해군) 사이에 건립된 편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열어 나라 일을 논의하던 곳입니다. 왕이 경희궁에 머물지 않을 때는 다른 용도로도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숙종이 승하했을 때 빈전으로 사용되거나 선왕들의 어진(초상화)이나 위패를 보관하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자정전


자정전 전각 또한 일제에 의해 허물어진 것을 오늘날 다시 복원한 건축물입니다. 지금은 복원된 건물이기에 역사와 전통성을 가지지는 못하지만 훗날 역사를 되살려 선조들의 얼을 이어가고자 했던 우리의 노력들은 후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리라 생각됩니다.






서암에서 바라본 자정전


자정전을 끼고 우측으로 돌아 나오니 커다란 암반이 보였습니다. 법궁을 다니면서 커다란 암반이 궁궐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커다란 암반을 보면서 창덕궁을 떠올렸습니다. 창덕궁이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건축한 세계 속의 으뜸가는 건축물로 평가받는 것처럼 경희궁도 자연을 훼손하지 않은 건축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궁궐에 자연 암반을 있는 그대로 남겨두고 건축물을 쌓아 올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서궐인 경희궁이 훼손되지 않았다면 창덕궁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암


이 바위는 서암이라 불리는 것으로 태령전 뒤에 오래전부터 자리하고 앉아 현재까지 남아있습니다. 경희궁이 헐어지고 새로운 건축물들이 들어설 때 없어졌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살아남아있다는 것이 너무나 반갑고 고맙습니다.






서암


서암이라 부르기 전에는 왕암(王巖)이란 이름으로 불리었기 때문에 광해군이 이곳에 경희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내려져옵니다. 훗날 숙종이 서암이란 명명하고 직접 서암이란 글씨를 사방석에 새겨두었는데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비록 서암이란 글씨는 남아있지 않아도 오랜 세월 서암에서 솟아 나온 물이 변치 않게 흘러내려 골이 파인 모습에서 기나긴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됩니다.






태령전

서암 좌측에 보이는 건물이 태령전입니다.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은 아니었고 1744년부터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다가 일제강점기 시절 다른 전각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가 복원된 곳입니다. 서암과 태령전을 바라보면서 감정이입을 해봅니다. 서암은 지금도 그 자리에 변치 않고 있는데 수많은 사람들과 전각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며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아련함과 회한보다 오히려 서암은 세상을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까 상상하며 서암에 잠시 앉아 쉬어봅니다.








태령전


현재 태령전에는 영조의 어진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경희궁에 영조의 어진이 보관되어 있는 이유를 짐작해보면

첫 번째는 조선 왕들의 어진 중 남아있는 것이 몇 개 되지 않으며 두 번째는 영조는 재위 기간 중 19년을 이곳에서 머무를 정도로 경희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바라본 경희궁


그러나 이런 의문이 듭니다. 영조는 경희궁을 사랑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사도세자가 죽은 후에도 이곳을 좋아했을까?






경희궁 전각 위 잡상


영조와 사도세자는 소통이 되지 않았기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비극이 벌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영조와 사도세자가 창덕궁에 같이 살았다면 많은 갈등이 있어도, 부자간에 죽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창덕궁에 남겨두고 경희궁에 와서 지내면서 사도세자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서로 만나지 않으면서 오해는 더 커지고 서운했던 마음은 미움으로 변했을지 모릅니다. 이는 사도세자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만나기 싫다고 떨어져 살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아니겠죠. 만남을 회피했기에 더 큰 문제가 발생한 것이겠죠.


오늘날 세대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요?






경희궁 위 공터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걷다 보니 어느덧 경희궁 위에 위치한 넓은 공터가 나옵니다. 과거 조선 시대 역동적인 사건이 가득했던 장소가 이제는 공터로 변해 시민들의 휴식처 및 운동하는 공간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경희궁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걷다 보니 인생을 살아가며 겪게 되는 작은 일들에 크게 연연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희궁 숭정문


경희궁을 뒤로하고 나오면서 많은 생각들이 지나쳐갑니다. 그러나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은 일제에 의해 우리의 것이 훼손되었다는 것입니다. 일제에 의해 많은 것들이 다시 되돌릴 수도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음에도 아직까지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화가 납니다. 그리고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없애버린 친일파와 그들의 후손들에 의해 농락되어 버린 시대가 안타까워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서울 중고등학교 터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벌인 일은 우리가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학교의 터전을 옮기는 일이 어려워도 이곳에 있던 서울 중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했던 것처럼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생각과 노력만 가진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흥화문


그래도 경희궁을 알리는 흥화문을 나오면서 느껴지는 씁쓸함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경희궁의 첫 번째 문이었던 흥화문도 옛 자리에서 쫓겨나 현재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복원된 흥화문도 제 자리가 아닌 엉뚱한 곳에 덩그러니 서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덕수궁 안에 있는 하마비가 덕수궁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처럼 경희궁의 흥화문도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없겠죠.






경희궁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


이제는 경희궁의 온전한 옛 모습을 사진을 통해서만 바라봐야 합니다. 흥화문 뒤로 경희궁의 전각들이 해체되어 없어져 버린 지금 사진 속 경희궁이 마지막 모습이 아닐까요?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사진을 볼 때마다 아쉬움은 묻어납니다.






경희궁 흥화문 터


경희궁을 나와 서울역사박물관을 지나면 작은 비석이 하나 서있습니다. 혹시 이 비석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경희궁의 시작을 알리는 흥화문의 원래 위치를 알려주는 비석입니다. 많은 이들이 무관심 속에서도 묵묵히 옛 기억을 담아 누군가 자신을 쳐다봐주길 바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흥화문터를 알리는 비를 본다면 사진 속 흥화문이 있던 자리와 지금의 자리를 비교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서 눈을 감고 상상해봅니다. 이곳에 경희궁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흥화문이 있었고 그 너머 서울역사박물관이 있던 자리에는 수많은 궁인들이 바쁘게 다녔을 250년 전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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