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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Nov 09. 2018

선덕여왕은 정말 지혜로운 여성이었을까?

 
선덕여왕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이 지혜로운 면을 보여주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온다. 선덕여왕과 관련된 설화들을 살펴보다보면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신과 교통하는 느낌까지 받는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선덕여왕 시기는 백제와 고구려의 거센 공격으로 영토는 축소되는 가운데 당나라 태종의 조롱까지 받는다. 대내적으로는 비담을 중심으로 한 진골계층들의 반란으로 결국 세상을 떠나는 모습에서 선덕여왕이 지혜로운 여성이었다는 말이 무색해진다.


선덕여왕과 관련된 설화를 통해 사실과 거짓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당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모란꽃이 그려진 그림과 씨앗을 보낸 이야기부터 해야한다. 선덕여왕은 이 그림을 보고 꽃 주변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을 것이라 말한다. 실제로 씨앗을 심어 꽃을 피우니 향이 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실제 모란꽃은 향기를 풍기며 벌과 나비를 불러 모은다. 이 설화는 신라에 인물이 얼마나 없으면, 여자가 왕을 할 정도로 궁색하냐며 당 태종이 신라를 조롱하는 일이었다.


두 번째 설화는 한겨울 영묘사 옥문지라는 연못에서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자, 선덕여왕이  여근곡(女根谷)에 적군이 있으니 섬멸하고 오라며 군대를 보낸 이야기다. 신라 병사들은 아무도 여왕의 말을 믿지 않고 어쩔수없이 출발했지만, 실제 서교(西郊)에 가보니 백제군 500여명이 숨어있어서 격퇴시켰다고 한다. 이는 선덕여왕이 자연을 통해 하늘의 뜻을 읽을 정도로 훌륭했음을 보여주는 설화지만, 실제 여근곡은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며 선덕여왕을 조롱하는 이야기다. 더욱이 백제의 군대가 경주와 가까운 여근곡에 올 때까지 알지 못했다는 것은 신라의 상황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보여주면서, 선덕여왕이 제대로 군권을 장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세 번째 설화는 선덕여왕 자신이 죽을 날짜를 예언하면서 도리천(忉利天)에 자신의 능을 만들어 달라는 이야기다. 신하들이 도리천을 모른다고 하자 선덕여왕은 낭산(狼山) 밑이라고 알려준다. 실제로 선덕여왕은 자신이 예언한 날짜에 세상과 이별하자, 신하들은 낭산 남쪽에 능을 조성했다. 이후 문무왕이 낭산 남쪽에 사천왕천을 상징하는 사천왕사를 지으면서 불교에서 말하는 낭산이 도리천이 되자 모두들 감탄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비담을 중심으로 한 진골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을 알지못하면서, 자신이 죽을 날을 예상했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훗날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지으면서 선덕여왕의 능이 도리천이 되었다는 말도 억지로 짜 맞춘 이야기를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제의 역사의 과정에서 선덕여왕이 집권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기 때문이다. 딸들 외에 남은 성골은 진평왕에 의해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진지왕의 두 아들 용수와 용춘 밖에 없었다. 자칫 용수와 용춘에게 왕위를 물려줄 경우 자신의 혈육이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진평왕에게는 선덕을 왕으로 만드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진평왕은 오랜 기간 후계자 수업을 한 끝에 선덕여왕을 즉위시켰다.


그 이후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용수와 용춘을 선덕여왕과 결혼시키지만, 끝내 자식은 보지못한다.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남자성골이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면서 신라 왕위 계승을 두고 여러 진골간의 갈등이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대내·대외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선덕여왕은 첨성대와 분황사와 같은 대형 사업을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했지만, 백성들의 반응은 늘 신통치 않았다. 특히 왕권을 노리는 진골들이 노골적으로 선덕여왕을 비난하자, 선덕여왕은 자신을 도와줄 측근으로 비주류였던 김춘추와 김유신을 선택했다. 용수의 자식으로 진골사이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김춘추와 금관가야 출신으로 중앙으로 들어오기 힘든 김유신을 뒷받침해주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김춘추

비록 이들은 선덕여왕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들지는 못했지만,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쥐게 된다. 이 때 갖게 된 권력을 바탕으로 왕이 된 김춘추와 군권을 장악한 김유신에 의해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김춘추(무열왕)와 그 후손들은 선덕여왕을 지혜로운 여성으로 추켜세워야 자신들이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인식과 태도는 고려시대까지도 이어져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선덕여왕을 뛰어난 군주로 표현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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