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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r 01. 2019

일제는 제암리 주민을 학살해야만 했을까?

1919년은 우리의 역사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해이다. 3·1운동 이전까지 반만년의 역사에서 모든 계층이 하나가 되어 같은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왕조들은 일부 지배계층의 나라였을 뿐이었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들에게 내 나라, 내 조국이라는 의식이 많지 않았다. 나라는 백성을 위한 일보다는 그들의 재물을 수탈하면서 가혹한 탄압을 일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00년대에 들어서면 그동안 시나브로 진행되던 사회·경제의 발달과 서구의 시민사상의 유입으로 백성의 의식이 성장하여, 나라의 주체가 백성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시민의식의 성장과는 별도로 조선은 일제에게 망하고 식민지가 되었다. 앞으로의 세상에서 당당하게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것을  꿈꾸던 사람들은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이전보다 더 암울한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런 가운데 1919년 민족지도자와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모든 민족의 만세소리에 놀란 일제는 민족지도자를 잡아들였고, 학생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휴교령을 내려 고향으로 내려 보냈다. 고향에 내려온 학생들은 일제의 의도대로 가만히 움추려 있지 않았다. 살고있는 지역의 인근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나라를 잃은 후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빼앗기면서 생계유지가 어려웠던 많은 한국인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발적으로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전국에서 많은 시위와 집회가 일어났지만, 그중에서도 경기도 화성 지역은 강력한 투쟁과 항의가 강하게 이루어졌다. 




화성의 송산·발안 지역의 장터가 열리자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머리위로 들어올리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3·1운동이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조기에 막고자 총을 발포하며 강력 진압에 나섰다. 일제가 쏜 총에 여러 사람이 맞고 쓰러지자, 주민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강력히 저항하였다. 그러나 총칼을 든 일제 군경에 맞설 수는 없었다. 


일제에 의해 여러 사람이 다쳤다는 소식이 인근 지역에 전해지자 4월 3일 수촌리에 살던 차병혁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수촌교회에 모여 시위를 준비하였다. 이들은 장안면사무소를 급습하여 불을 지르고 쌍봉산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 선언을 읽은 뒤, 우정면사무소를 불 질러 버렸다. 이 때 모인 사람의 숫자가 이천명을 넘는 대규모의 시위집단이었다. 이들은 행정적으로 한국을 지배하던 면사무소를 부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총과 칼을 앞세워 한국인을 억압하던 화수리 주재소로 나아갔다. 많은 무리가 주재소로 몰려오자 일본 경찰은 총을 쏘며 도망갔다.


이후 일제 경찰은 지원 병력을 받아 우정·장안면의 많은 민가를 불태우며 보복에 나섰다. 그중에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학살을 자행된 곳이 제암리였다.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일제 군인은 4월 15일 오후 2시경 제암리 주민들을 찾아와 3·1운동 진압과정에서 무리한 폭행과 탄압과정이 있었음을 시인하고 사과를 하겠다며 교회로 한명도 빠짐없이 모이라고 하였다. 


3·1운동을 통해 우리의 저력을 확인했던 마을 사람 30여명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일제의 사과를 받기 위해 제암리 교회로 모였다. 노인에서 어린 아이까지 모두 교회당에 모이자, 일본군은 교회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 건물 주변에 볏짚을 쌓아두었다. 그리고 교회당에 무차별적으로 총을 쐈다. 마을 주민이 총격을 피해 교회당을 빠져나오려고 하자 일제 군경은 쌓아두었던 볏집에 불을 붙였다. 이 때 한 여인이 어린 자식만은 살려달라며 창밖으로 내어놓자, 일제는 칼로 아이를 찔러 죽여 버렸다. 이 때 자그마치 교회당에서 23명, 뜰에서 6명이 죽었다. 만행을 저지른 일제는 사실을 숨기고자 마을 31채에 모두 불을 질러버렸다. 



이렇게 잊힐 뻔했던 사건은 우리에게 석호필로 더 잘 알려진 캐나다 선교사 프랑크 스코필드(1889~1970)에 의해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스코필드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던 이갑성이 3·1운동에 대한 기록과 독립선언문을 백악관에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고 3.1운동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었다. 그는 4월 17일 제암리 학살 사건을 전해 듣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제암리 현장에 도착하여 참혹한 현장을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일제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수촌리에 가서 일제에 의해 부상을 당한 사람을 돌봐주었다. 


스코필드는 한국을 떠나면서 3·1운동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일제에 빼앗기지 않고 미국으로 가져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우리는 잊힐 뻔 했던 제암리 학살 사건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3·1운동 당시 제암리에서만 학살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스코필드에 의해 기록이 남겨지면서 일제의 학살을 대표하는 사건이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내내 한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일제는 언제 어디서든 스스럼없이 우리를 때리고 가둔 뒤 죽여 버렸다. 그들은 폭력을 통한 공포와 위협을 통해 영원한 한국지배를 꿈꿨다. 하지만 우리는 일제가 행했던 공포와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오늘도 일제의 만행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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