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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Feb 09. 2019

광주 시민을 공산당으로 만든 신군부


1979년 유신체제는 붕괴 조짐을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이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자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부마항쟁이 일어나는 등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거센 저항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권력층은 이런 움직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예전처럼 폭력을 통해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측근들은 궁정동 안가에서 술판을 벌였다. 이 때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죽이면서 1970년대의 유신체제는 막을 내리고 격동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많은 시민과 학생들은 제4공화국 유신체제가 무너지자, 민주화가 이루어지리라 생각하고 기뻐했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은 곧 사라졌다.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을 중심으로 노태우 등 신군부가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으면서 대한민국은 다시 군부 독재 국가로 전락하였다. 군인들의 정치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1980년 5월 15일 전국 학생 연대 등 20여만 명이 서울역에 모여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였다. 이에 신군부는 민주 항쟁을 해산시키기 위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확대하고 26명의 정치인을 연행하여 감금시켰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위가 점차 잦아든 것과 달리, 광주는 민주화의 시위가 가라앉을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신군부는 광주에 계엄령을 내리고 광주 인근에 있던 7공수부대를 5월 18일 광주에 투입하여 학생들을 진압하였다. 공수부대는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에 따라 광주 시위를 진압하였다. 공수부대가 시민에게 총을 쏘며 진압했지만, 오히려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는 더욱더 거세어져서 광주에서 쫓겨났다.


12.12 쿠데타를 쉽게 성공했던 신군부는 광주 시민의 거세 저항에 당황하였다. 광주의 소식이 타 지역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한 계엄사령부는 광주에 간첩들이 내려와 소동을 벌이고 있다고 언론을 통해 전국에 거짓 발표하였다. 그러면서 광주 시민을 진압할 병력을 보충하였다. 민주화 운동이 간첩에 의한 내란 행위가 되었다는 소식에 광주시민들은 5월 20일 광주 금남로에 모여 더욱 강한 농성을 벌였다. 이때 모였던 숫자가 십만여 명을 넘었다. 

신군부는 금남로에 모인 시위 군중에게 어떤 경고도 없이 총을 난사하였다. 이 발포로 많은 사람이 죽자 분노한 시민들은 경찰서에서 탈취한 총으로 무장하고 전남 도청을 점령하였다. 시민군의 무장에 당황한 계엄군은 뒤로 잠시 물러나 무기를 반납할 것을 요구하였다. 계엄군의 요구에 광주의 시민군은 무기 반납을 두고 의견이 둘로 나누어졌고, 끝까지 투쟁을 주장한 시민군은 도청에 남았다. 


5월 26일 자정 계엄군은 강력한 화기를 앞세워 도청에 진입하여 시민군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그러나 시민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새벽 5시가 되어서 총격전이 끝났고, 5‧18 민주 항쟁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많은 진실이 역사의 어둠 속에 파묻혔고, 일부 사람들에 의해 지금까지도 감추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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