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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an 25. 2019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다양한 평가

삼국시대 마지막 승리의 주인공은 강력한 군대를 가졌던 고구려나 화려한 문화를 꽃피었던 백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토속적 색채가 강하여 세련되지 못했고, 군사적으로도 가장 힘이 약했던 신라였다. 군사·경제력 등 객관적 우위에 있는 나라보다, 가장 절실한 국가가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신라의 삼국통일이었다.


신라는 7세기 백제의 무왕과 의자왕의 거센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영토를 계속 빼앗기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오히려 영토를 되돌려달라는 겁박을 당하며 고립되었다. 바다 건너 일본도 백제와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신라에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국가는 중국 당나라뿐이었다. 고구려와의 여러 차례의 맞대결에서 패배하면서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패자가 되지 못하던 당나라에 신라의 구원요청은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물론 나·당 동맹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선덕여왕을 조롱하면서 괴롭혔지만 말이다. 이해관계가 맞았던 두 나라는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갖고, 고구려의 영토인 요동과 만주 그리고 한반도 북부는 당나라가 갖기로 합의한다.


신라와 당은 곧바로 실행에 옮겨 660년에 백제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당은 원래의 약속을 깨고 신라도 차지하려는 속내를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백제의 땅에 다섯 개의 도독부를 설치했다가, 웅진도독부만 남기고 그 아래 7주 52현을 두어 당나라 영토로 삼았다. 백제가 멸망한 후 3년 뒤인 663년에는 신라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을 임명하면서 형식적이기는 했으나 신라를 당나라의 지방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1년 뒤에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한 뒤 신라 문무왕과 취리산에서 회맹시켰다. 이로써 신라에 당의 동맹국이 아니라 속국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백제와 신라에 설치된 도독부를 총괄한다는 의미로 안동도호부를 평야에 설치하였다. 이에 신라는 자신들도 당나라에 멸망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고구려·백제 유민을 끌어모아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내쫓는 통일 전쟁을 전개하였다. 다행히 고구려의 왕족이었던 안승이 신라에 귀순하는 등 고구려·백제 유민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당나라군을 내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당 동맹에서 맺었던 약속대로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만을 신라가 차지하고 이북은 넘겨주면서 삼국의 통일을 이뤘다.


신라가 삼국 통일 과정에서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이었던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큰 비판을 받는다. 더욱이 고구려의 광활했던 영토를 중국에 빼앗겼다는 점은 후대 많은 이들이 아쉬움을 넘어 한탄을 토로하게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반론을 살펴보면 7세기 고구려와 백제는 기득권을 가진 귀족 계층들이 권력 투쟁과 내분으로 국가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백제와 고구려의 마지막을 살펴보면 의자왕은 웅진으로 피신 간지 5일 만에 웅진 성주 예식진에 의해 당나라에 넘겨졌고,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은 당나라 군대의 길잡이를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강력한 적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무너져가고 있어서, 신라의 통일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오리란 보장이 없다고 말한다. 결국 신라의 삼국통일은 오늘날 각자 다른 판단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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