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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an 18. 2019

종교를 넘어 하나가 되기를 꿈꾼 원효

원효대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백제 유민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왕권을 높이고 백성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불교와 승려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많은 승려들의 노력으로 700년 가까이 다르게 살아가던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삼국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크게 활약했던 분이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원효대사(617∼686)다.


진평왕 때 태어난 원효대사는 6두품 출신으로 골품제사회인 신라에서 능력을 마음껏 펼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원효대사는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며 당대 인도와 중국보다 높은 학승(학문으로 이름을 높인 승려)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또한 왕과 귀족만의 특권으로 여겨지던 불교를 대중화시켰다.


원효대사는 15살에 출가하여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에는 승려들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경우가 많아, 원효도 의상과 함께 두 차례에 걸쳐 유학길을 나섰다. 첫 번째 길은 요동에서 고구려 군에게 잡혀 실패했고, 두 번째는 동굴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뒤 깨달음을 얻고 신라로 되돌아왔다.


신라로 되돌아 온 원효는 인간은 모두 불심(佛心)을 가진 평등한 존재로 보고 화쟁 사상을 주장하였다. 화쟁 사상에서 왕과 진골 계층만이 부처의 가르침으로 성불하는 것이 아니라, 하층민들도 정성된 마음을 가지고 부처님을 믿고 따르면 충분히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효창공원에 있는 원효 동상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귀족과 하층민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였다. 신라는 불교 자체가 특권계층을 옹호하는 측면에서 수용되다보니 귀족들의 입장에서 하층민과 같은 위치에 서는 것을 거부하였다. 하층민들은 6두품 출신인 원효의 말에서 진심을 느끼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효가 자신의 뜻을 전파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귀족에게는 높은 학문적 성과로 인정받고, 하층민들에게는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일상생활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믿게 하는 것이었다.


원효는 종파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불경을 섭렵하여 『대승기신로소』와 『십문화쟁론』을 저술하였다. 이를 통해 각 종파마다 다르게 주장하는 불교사상을 하나의 원리로 연결시켜놓았다. 일반 백성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통해 마음이 중요하다는 정토신앙을 널리 알렸다.


정토신앙은 어려운 불교 경전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끊임없이 염불하면 극락에 갈 수 있는 깨달음을 얻고, 현재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다음 세상에서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승려인 원효 자신이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 정분을 통하여 설총을 낳고, 커다란 박을 허리에 차고 술집을 찾아 기생들과 어울렸다. 스스로 부처님의 계율을 어겼지만, 부처님을 믿고 따르기를 마음으로 먹는다면 얼마든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몸소 보여주었다. 


원효대사를 중심으로 정토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도 신라와 하나의 민족이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정토신앙에 따라 신라인으로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과거의 출신과 배경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다. 일심(一心)사상으로 국적과 신분을 초월해 모두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던 원효대사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끊임없이 외치며 설파한 결과 많은 사람들에게 안정과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지금도 종교를 초월하여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염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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