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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y 11. 2019

중국은 왜 발해의 역사를 왜곡할까?

대조영(?~719)은 고구려 멸망 30년 뒤 동모산에서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천명하고 진국(震國)을 세웠다. 당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을 영구적으로 자신의 영토로 만들려 했으나 고구려의 동북쪽은 저항이 심해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주인 없는 땅이었다. 그곳에서 대조영이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당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퍼져 나가자 수많은 옛 고구려인이 모여들었다. 대조영이 세운 진국의 힘이 날로 커지자 당나라는 마지못해 발해군왕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나라로 인정하기는 싫어서 고을 군(郡)으로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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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이 무리를 이끌고 동쪽 계루 옛 땅으로 들어가 동모산을 거점으로 성을 쌓고 거주하였다. 대조영이 용맹하고 용병을 잘하여 말갈 무리와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점점 대조영에게 귀복하였다. 대조영은 진국 왕이 되어 사신을 보내 돌궐과 통하였다. 출처: 구당서




당나라가 인정하기 싫다고 해서 발해가 국가의 체제를 갖추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선왕 때에 이르면 고구려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가진 강국이 되었다. 드넓은 영토를 바탕으로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동아시아의 강대국이 된 발해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당도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부르며 인정하고 존중하였다. 이토록 거대하고 강했던 발해가 926년 거란의 공격에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하고 멸망해버렸다.


이후 왕건이 세운 고려가 옛 고구려의 영토를 되찾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북진정책을 펼쳤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고 만주 벌판은 우리 역사에서 한동안 사라졌다. 그러나 발해가 우리의 역사라는 인식은 계속 이어져서, 조선 후기에는 유득공의 『발해고』가 편찬되어 우리의 역사로 기록하였다. 1800년 전후로는 삶이 어려워진 조선 사람들이 옛 우리의 영토였던 간도로 넘어가 논과 밭을 일구며 정착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일제와 간도협약(1909)을 맺고 간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었다. 하지만 간도협약 자체가 무효라는 것을 아는 중국은 간도 지역을 한국의 역사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동북공정이라는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


동북공정에서 중국은 발해를 우리의 역사가 아닌 말갈족이 세운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발해가 중국의 지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대내외적으로 밝힌 역사적 사건들이 가득하다. 우선 중국 역사서인 『구당서』를 보면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표기하며 고구려 계통이라 밝히고 있다. 발해의 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도 자신을 고려(고구려의 또 다른 이름) 국왕이라고 밝히며,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발해의 지배 계층을 이루던 성씨에서도 대씨와 고씨가 가장 많았던 사실은 발해가 고구려인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음을 보여준다.



일상생활에 들어가 살펴봐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보여주는 유물과 유적이 많다. 제3대 문왕의 딸인 정혜 공주 무덤은 굴식 돌방무덤에 모줄임천장 구조로 전형적인 고구려 무덤 양식을 따르고 있다. 또한 발해는 난방 방식으로 온돌을 사용하였다. 참고로 구들장을 데워 추운 겨울을 이겨내던 온돌은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 사용하던 난방 방식이었다.


이처럼 발해가 우리의 역사임은 확실하지만 중국이 억지 주장을 펴는 또 다른 이유가 중국 내 위구르족과 티베트족의 독립을 막고 확산을 저지시키기 위해서다. 이들이 분리 독립하는 경우 다른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중국이 분열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소수민족 역사를 모두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한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가 만나는 동북 3성의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동북 3성에 자리 잡고 있는 중국 동포(조선족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수민족 가운데에서도 역량과 영향력이 가장 크다. 중국 동포들이 통일된 한국과 연계하여 간도를 되돌려 받으려 한다면, 중국은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태를 미리 차단하려는 것이 중국의 동북공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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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와 고씨가 망한 다음에 김씨의 신라가 남에 있고, 대씨의 발해가 북에 있으니 이것이 남북국이다. 여기에는 마땅히 남북사(南北史)가 있어야 할 터인데, 고려가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출처: 발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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