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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y 25. 2019

도루묵까지 왜 선조를 비난할까?

조선 시대 가장 무능력하고 비겁한 왕으로 선조와 인조를 이야기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특수성이 있기에 국정을 책임지는 왕으로서 비난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 둘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선조는 조선 시대 최초의 서자 출신인 왕이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였던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누구도 왕이 되리라 생각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조선 시대 양반의 서자는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도 없었고, 선조들의 제사에도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직계도 아닌 방계의 선조가 왕이 되었으니 많은 사람이 뒤에서 수군거렸다. 서자라는 꼬리표는 자연스레 선조의 콤플렉스가 되었다. 선조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였다. 문제는 그 방법이 신하들을 이간질하여 분열시키고 싸우게 한 뒤, 선조가 한쪽을 편드는 식이었다. 선조의 국정 운영 방식은 붕당의 분열로 이어져 피비린내 나는 정쟁을 계속 일으켰다. 예를 들어 정여립의 모반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1,000여 명의 사람을 죽인 기축옥사는 선조 자신이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은 정철에게 뒤집어씌웠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벌인 치졸하고 비겁한 일들은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하기도 힘이 들 정도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를 들자면 선조가 한성을 버리고 개경, 평양 그리고 의주로 제일 먼저 피난 가면서, 백성들에게는 늘 자신은 여기서 뼈를 묻을 각오로 왜를 맞아 싸우겠다고 공언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뒤로 물러나지 않겠다고 그토록 호언장담하던 선조는 왜군이 북진하고 있다는 소리만 들리면 누구보다 먼저 짐을 챙겨 도망갔다.     

        


사료 보기


적이 한양을 차지한 지 이미 2년이 지나면서 적병의 칼날이 미치는 곳은 천 리 어디에도 없었다. 백성은 밭을 갈지 못하고 씨를 뿌리지 못하여 거의 다 굶어 죽었다. 한양에 남은 백성들은 온갖 고생을 하면서 (중략) 굶주린 백성들이 좌우에 있으면서 슬피 부르는 노래가 처량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기저기 쓰러져 죽은 자가 무척 많았다. 출처징비록



그리고 의주에서는 명나라로 망명하기 위해 왕위를 버리고자 하였다. 모든 문무백관이 그것만은 안 된다고 하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관리를 나누어 준 뒤, 종묘사직을 받들고 왜에 맞서 싸우라며 최전선으로 내보냈다. 광해군은 이런 상황에서도 힘을 내어 16개월 동안 의병을 독려하고 관군을 모아 왜에 맞서 싸웠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국난 초기 어려웠던 전쟁을 수습하고 백성들을 다독였던 광해군을 선조는 예뻐하거나 고마워하지 않았다. 국정이 안정되자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광해군을 시기 질투하였다. 또한 왕위를 계승할 광해군이 서자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선조는 인목대비에게서 영창대군을 보게 되었다. 어떻게든 영창대군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임진왜란 당시 사지에 몰아넣었던 광해군을 관료들 앞에서 대놓고 무시하고 따돌렸다.            



선조가 왕의 자질을 보여주려고 만든 이야기


명종이 덕흥대원군의 아들들을 불러 익선관을 써보라 하였다. 하원군과 하릉군은 별말 없이 익선관을 썼지만, 하성군(훗날 선조)은 현직 왕의 익선관을 함부로 쓸 수 없다 하여 물러났다. 이런 하성군의 겸손한 태도를 명종이 마음에 들어 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이는 명종이 마지막까지 최대한 왕위를 계승할 사람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서자 출신인 선조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생각한다.



이처럼 선조는 이익이 되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예전에 내뱉었던 말이나 행동과 달라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런 선조를 꼬집는 재미난 이야기로 도루묵이 있다. 선조는 피난길에 백성들이 정성스레 갖다 바치는 음식들에 독이 들었을까 의심스러워 먹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피난길에 배고프고 고단해진 선조는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음식들도 먹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먹은 음식 중의 하나가 ‘묵’이라는 생선이었다.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생선이었지만,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듯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고기가 살살 녹아버릴 정도로 맛있었다. 선조는 너무 맛있는 생선의 이름이 묵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손수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내렸다.


피난길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어느 날, 선조는 묵이 너무나 먹고 싶어졌다. 신하가 가져온 묵을 보며 군침을 삼키던 선조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는 순간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예전과 달리 너무나 맛없는 묵의 맛에 선조는 은어라는 이름을 하사한 것이 너무 아까웠다. 그리고 은어라는 좋은 이름을 하사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다시 묵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이처럼 선조가 “도로 묵이라 불러라.” 해서 붙여진 도루묵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추진하다 실패했을 때 “말짱 도루묵이다.”라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루묵의 이야기가 선조와 관련 없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항간에서 선조의 이야기로 널리 알려졌다는 것은 사실의 여부보다 선조의 행동을 비난하고 조롱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위 글은 족집게 한국사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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