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호 May 18. 2019

기황후는 드라마처럼 애국자였을까?

고려는 시기에 따라 지배 계층이 자주 바뀌었다. 그러나 지배 계층이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한 시기는 많지 않았다. 원 간섭기는 정도가 더 심하였다. 고려 중기의 문벌 귀족이나 무신들도 백성들을 괴롭히고 수탈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지만, 원 간섭기 권문세족에게는 명함도 내밀 수 없었다. 권문세족에는 고려 전기부터 이어져 온 가문도 있었지만, 원나라에 빌붙어 새롭게 등장한 이들도 많았다. 자신의 능력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오른 관료와 통역을 담당했던 역관이나 원 황실로 들어간 환관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 권문세족은 원나라 황실 및 관료들과의 혼인을 통해 더 큰 권력을 가진 부원세력으로 성장하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려보다 원나라의 신임을 얻는 것이 훨씬 중요하였다.


권문세족에게 나라를 운영하는 식견이나 능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잘 읽고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실력이었다. 그렇다 보니 권문세족은 문학적 소양 등 전체적인 면에서 기존의 문벌 귀족이나 무신들보다 많이 부족하였다.         


            


신진사대부


권문세족을 비판하던 신진사대부는 경제적으로 지방의 중소 지주 출신, 사회적으로는 향리 또는 하급 관리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과거제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권문세족의 횡포를 비판하며 성리학을 바탕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원 간섭기 부원세력으로 성장했던 대표적인 가문을 찾는다면 원나라 순제의 황후가 되었던 기황후의 집안이 있다. 기황후의 아버지인 기자오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자신의 막내딸을 원나라 황실에 공녀로 보냈다. 고려 말의 공녀는 신분이 낮고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권문세족들이 출세를 위하여 원나라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자신의 딸을 앞다투어 공녀로 바치는 것이 보편적이어서, 기자오의 행동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기자오는, 고려인이지만 원 황실의 환관이 되어 중요 직책을 맡고 있던 고용보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막내딸을 순제에게 차를 따르는 궁녀로 만들었다. 왕이 되기 전 고려로 유배를 왔던 경험을 가진 순제는 기황후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가까워졌다. 그리고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당시 순제는 황권을 위협하던 다나시리 황후 일족을 제거하고 바얀 후투그를 새로운 황후로 맞이했었다. 그러나 황후 바얀 후투그는 후사를 계승할 아들을 낳지 못했다. 순제는 바얀 후투크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명분으로 1339년에 아들을 낳은 기황후를 황후의 자리로 올려놓았다.


몽골이 세운 원나라에서 제3신분이던 고려인이 황후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고려 출신인 기황후가 순제의 아내이자 훗날 북원 소종의 어머니가 되었으니, 고려에서 기자오 집안의 위세가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기황후의 오라버니인 기철의 만행은 거칠 것이 없었다. 원나라 황제가 자신의 매부였으니 고려에서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고려의 왕조차도 기철이 마음을 먹는다면 쉽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여서, 왕 앞에서 신(臣)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사료 보기


공민왕이 어느 날 행성으로 가서 원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하였다. 기철이 임금과 말을 나란히 하며 이야기하려고 하자, 왕이 호위 군사를 시켜 앞뒤로 갈라놓고 곁에 오지 못하게 하였다. 출처고려사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행동하던 기철에게 제동이 걸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바로 공민왕(1330~1374)의 즉위였다. 반원자주 정책을 내세웠던 공민왕은 기철에게 있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더욱이 공민왕이 권문세족을 제거하기 시작하자 기철은 공민왕을 내쫓을 역모를 꾀하였다. 기철의 역모를 눈치챈 공민왕이 한발 앞서 1356년 기철을 연회에 불러들여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기황후는 오라버니를 죽인 공민왕을 내쫓기 위해 충숙왕의 동생 덕흥군을 고려 왕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1364년 최유에게 병사 1만을 주고 고려를 침공케 하였다. 하지만 최유의 군사가 고려의 최영 장군에게 패하면서 기황후의 복수는 실패하였다. 외국 군대를 보내 조국을 공격한 권문세족과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윗글은 족집게 한국사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족집게한국사


이전 12화 중국은 왜 발해의 역사를 왜곡할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