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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Nov 22. 2019

불명예스럽게 죽어 억울한 경애왕

출처 : kbs드라마

통일 신라가 천년의 세월이 흐르자 새로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과거의 제도와 악습을 답습하며 몰락하고 있었다. 골품제라는 신분제에 국한되어 기득권을 챙기는데 급급한 진골들만 가득한 신라는 왕들의 노력만으론 변화가 불가능하였다.


그러한 때 경애왕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경애왕은 후백제의 견훤이 군대를 이끌고 경주에 들어온 것도 모른 채, 포석정에서 왕비와 후궁들을 거느리고 술판을 벌이며 놀다 죽은 왕으로 많은 이들이 기억한다. <삼국사기>를 비롯해서 <동국통감>등에서 경애왕의 마지막을 무책임한 왕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애왕이 이 기록을 본다면 강한 어조로 부정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제55대 경애왕(재위 924~927)은 성이 박씨다. 아버지였던 신덕왕이 김씨에서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재위에 오르며 수백 년 만에 박씨에서 왕이 배출된 것이다. 내물왕(재위 356~402) 이후 김씨가 왕위를 독점한지 약 오 백년만이다. 이는 김씨가 더 이상 통일 신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박씨에 대한 기대감의 표출이라 해석할 수 있다.

포석정, 출처 : 두산백과

경애왕은 형이었던 경명왕 시절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상대등을 역임하며 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국정운영을 배웠다. 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자 왕으로 즉위한 경애왕은 신라의 힘만으로는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쪽을 도와줌으로써 세력 균형을 맞추어야 했다. 그래서 선택된 나라가 고려였다.


우선 경애왕은 924년 민심을 끌어들이기 위해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고 선승 300명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당시 민중의 환영을 받으며 크게 교세를 넓히고 있던 선종을 끌어안으며, 선덕여왕이 신라의 위기를 극복했던 역사를 답습한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어 925년 왕건이 고려에 투항한 능문 장군을 돌려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시 고려는 후백제와 인질을 교환하며 화친을 추구하던 해이기도 하였다. 경애왕은 화친을 막기 위해 사신을 고려에 파견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고려와 후백제가 치열한 전쟁을 벌여야 이득을 보는 경애왕의 입장에선 매우 초조하고 불안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926년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고려에 와 있던 견훤의 외조카 진호가 죽자, 견훤이 왕건의 사촌동생인 왕신을 죽이고 웅진까지 쳐들어갔다. 경애왕은 고려와 후백제의 전면전으로 오는 이해득실을 따지며 왕건에게 싸움을 부추겼지만 왕건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고려가 후백제보다 국력이 약한데다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하면서 국력을 분산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애왕릉, 출처 : 시가 있는 갤러리 빈

반면 후백제의 견훤의 입장에서는 고려를 부추겨 전쟁을 일으켜 이익을 취하려는 경애왕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더욱이 중국 후당과 결속하려는 통일신라의 모습은 자칫 후백제를 고립시킬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결국 견훤은 군대를 이끌고 경주로 향했다. 이에 경애왕은 왕건에게 구원 요청을 보냈지만, 왕건이 보낸 1만의 군대가 올 때까지 버티지 못했다. 경애왕은 견훤에게 포석정에서 붙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했고, 여인들은 능욕을 당해야만했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신라가 후백제를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다. 왕건이 직접 5천 기병을 이끌고 통일신라를 구원하러 갔으나, 오히려 공산 동수(팔공산)에서 대패하고 간신히 목숨만 건지게 된다. 이때 왕건은 충신이던 신숭겸과 김낙을 잃는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고 포석정에서 놀고 있었다는 장면이다. 외교적으로 신라를 일으키려 노력했던 경애왕의 모습을 보았을 때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는 아마도 후백제 견훤의 무자비한 폭군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그 당시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경애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억울할 수도 있다. 국가를 위한 자신의 노력은 기억되지 못하고, 자신의 죽음만을 기억하는 후대를 보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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