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고고학자 켄멜이 극찬한 한국의 문화유산이 있다. 우리에게 에밀레종으로 널리 알려진 성덕대왕 신종이다. 또 다른 이름으로 봉덕사종이라고도 부른다. 켄멜은 ‘이 종 하나만으로 박물관을 세우고도 남는다.’라고 이야기했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유홍준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소리’라고 극찬한 에밀레종에는 가슴 아픈 전설이 담겨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의 명복을 위해 최고의 종을 제작하려 하였으나 연이은 실패로 완성을 보지 못했다. 뒤를 이어 혜공왕(재위 765~780)이 종 제작을 완성시키려 하였으나, 진척이 없었다. 종의 형체를 갖추었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혜공왕은 봉덕사의 승려들에게 왜 소리가 나지 않는지를 질책했다. 이에 승려들은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종을 제작하기 위해 민가를 돌아다니며 종 제작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시주에 나섰다.
이 때 한 여인이 시주할 것이 없으니, 아이라도 받아주기를 청하였다. 아무리 왕을 위해 만드는 종이었지만, 아이를 시주로 받을 수는 없었던 승려는 정중히 거절하며 아이의 복을 기원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주지스님의 꿈에 아이를 시주로 받지 않으면 종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계시가 내려왔다. 주지스님은 마음이 무거웠지만 하늘의 뜻이라 여기며 아이를 시주로 받았다.
그리고 종을 만드는 과정에 아이를 넣었다. 큰 죄를 저질렀다는 무거운 마음으로 힘들어하면서도, 아이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위해 종이 완성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드디어 종이 완성되고 타종하는 순간 지금까지 들어보지 아름다운 소리와 함께 구슬프게 엄마를 부르는 ‘에밀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밀레는 어머니를 뜻하는 말이다. 그 자리에 있던 승려들과 아이를 시주로 바친 어머니는 모두 눈물을 흘리며 속죄했다. 이후 봉덕사종보다는 에밀레종으로 널리 불리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 전설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혜공왕은 8살에 왕으로 즉위하여 23살에 반란으로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역사에서는 혜공왕부터 신라가 무너졌다고 인식하고, 신라를 구분하는 잣대로 삼는다. 혜공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에 어머니인 만월부인과 외숙이었던 김옹의 눈치를 봐야했다. 사실 혜공왕이 에밀레종을 완성시킨 주체가 아닐 수도 있다. 에밀레종에 ‘태후께서는 은혜로움이 땅처럼 평평하며 백성들을 어진 교화로 교화하시고, 마음은 하늘처럼 맑아서 부자의 효성을 장려하셨다. 이는 아침에는 왕의 외숙의 어짊과 저녁에는 충신의 보필을 받아 말을 가리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행동에 허물이 있으리오.’라는 글이 새겨져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자식까지 희생시킬 정도로 백성들이 매우 가난한 당시 신라의 모습을 전설에서 보여준다. 신라가 국가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이처럼 시대적 아픔을 담고 있는 에밀레종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자부심을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뛰어난 문화유산인 에밀레종을 세계에 더욱 알리기 위해 역사학자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1990년대 말 종의 무게가 19t에 달하며, 아이를 넣어 만들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혀냈다. 1,30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버려져 바닥에 뒹굴어졌던 에밀레종은 아직도 균열을 일으키지 않고 잘 보존되어있다. 타종이 영구 중단되어 들을 순 없지만, 지금도 타종을 하면 소리가 1분이 넘도록 지속되며 수km밖까지 울려 퍼진다. 역설적이지만 세계의 모든 문화유산이 민중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으며 에밀레종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음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