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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Dec 06. 2019

후삼국통일의 일등공신 나주

통일신라가 변화되는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자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두 명의 큰 인물이 등장했다. 후고구려의 궁예와 후백제 견훤이다.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이 둘에게 모였다. 넓은 영토를 차지한 궁예와 가장 비옥한 지역을 차지한 견훤은 새로운 사회의 주인이 되고자 끊임없이 경쟁하였다. 


특히 풍요로운 곡창지대와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견훤이 새로운 사회의 주인이 되는데 있어 한발짝 더 가까이 있었다. 특히 서남해 바다를 장악하고 있던 후백제로 인해 후고구려는 중국의 왕조의 도움을 받기 어려웠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궁예는 903년 해상무역으로 바닷길을 잘 아는 왕건에게 금성을 정벌케했다. 후고구려(당시 태봉으로 국호를 바꾸었다.)의 침략을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던 후백제는 기습적인 공격과 왕건의 뛰어난 전술로 10여개의 군현을 빼앗겼다. 그리고 금성이란 지명도 나주로 바뀌게 된다. 


후백제에게 있어 나주의 상실은 뼈아픈 실책으로 다가왔다. 우선 후고구려를 상대하기 위해 남북으로 군대를 분산배치하며 공세에서 수세로 바뀌었다. 또한 중국 오월과 왜의 교류가 막히며,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막기위해 노력해야했다. 더불어 나주의 소금과 도자기 산업 그리고 곡창지대를 빼앗기며 후백제의 국고가 줄어들었다. 특히 나주의 호족들이 후고구려에 투항한 것은 후백제의 우위가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더 큰 문제였다.

왕건


견훤은 주도권이 후백제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910년 직접 3,00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나주를 침략했다. 그러나 바람을 이용한 화공에 견훤은 큰 패배를 당하고 만다. 여기에 수달이라 불리며 서남해를 주름잡던 능창이 어이없이 왕건에 잡혀버렸다. 후백제에서 가장 유능한 수군장수가 후고구려에 끌려가 죽으면서, 견훤은 왕건이 나주에 머무는 동안은 나주를 되찾아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이로서 왕건의 위명은 더욱 높아졌고, 견훤은 분을 삭혀야만 했다. 


그런 견훤에게 왕건이 후고구려의 수도로 넘어가는 914년은 나주를 탈환할 수 있는 기회였다. 견훤은 다시 군대를 모아 나주를 공격하였으나, 왕건이 나주로 다시 파병되면서 또 다시 실패하고 만다. 이후 후백제는 나주를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그리고 후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나주는 아킬레스건이 되어 괴롭혔다. 


이후 견훤이 아들 신검의 반란으로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나주를 통해 고려로 도망갔다. 견훤이 왕건의 선봉장이 되어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침공했을 때, 어느 지역보다도 고려를 지원했던 지역도 나주였다. 이는 나주 지역의 호족과 백성들이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후백제가 후삼국을 통일했을 경우 겪게 될 고통이 어떠할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왕건의 고려가 삼국통일을 이루었을 때, 최대 수혜자가 자신들이라는 기대감도 한몫했다. 왕건은 나주에 머물 당시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한 여인을 만난다. 그 여인은 왕건에게 바가지에 한가득 물을 담아 주기 전, 체하지 말라고 버드나무 잎을 띄어주었다. 이 현명함에 반한 왕건은 세력이 약한 호족의 딸이었던 이 여인을 품에 안는다. 


왕건은 아이는 갖지 않기 위해 질외 사정을 했으나, 이 여인은 손으로 정액을 질 안에 넣어 아들을 낳는다. 이렇게 태어난 아들이 왕건의 첫 번째 아들이자 고려의 제2대 왕인 혜종이다. 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새로운 주인이 나주 출신이라는 사실에 큰 기대감을 가졌으나, 혜종이 일찍 죽으며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나주 출신의 고려인은 이후 어떤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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