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 발해를 무너뜨리고 동북아시아의 강자가 된 요나라는 중국 본토를 지배하고 싶었다. 그러나 옛 고구려 땅을 되찾으려는 고려가 배후에 있는 한, 중국 송나라를 공격할 수 없었다. 요는 고려를 정복하여 후환을 없애고 싶었지만, 고려의 강군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최대한 많은 군대(80만)로 고려를 위협하여 북진을 저지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1차 침입, 993년) 하지만 고려는 요와의 약속과는 달리 송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거란을 불안하게 했다.
그러던 중 고려에서 강조가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왕으로 옹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요 성종은 즉각 ‘신하가 군주를 폐위시키고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고려를 쳐들어왔다. 이에 강조는 30만 고려군을 거느리고 거란 성종이 끌고 온 40만 대군에 맞섰다.
강조는 통주성(평안도 선천)에 군을 셋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거란을 상대로 계속되는 승리를 거두었다. 요 임금인 성종이 직접 대군을 끌고 왔음에도 이토록 고전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예와 군 통솔력이 뛰어났던 강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전차의 몸체와 바퀴에 칼을 빼곡히 꽂아 놓은 검차가 큰 위력을 발휘하며 거란군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강조는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방심하다가 거란군의 급습에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요 성종은 강조의 뛰어난 능력을 흠모하며 신하가 되기를 권하였으나, 강조는 거절하고 고려인으로 죽었다. 이 과정에서 강조는 요에 귀순하겠다며 나라를 배반하는 이현운을 걷어차며 꾸짖기도 하였다.
고려인으로 죽은 강조는 충신이었을까? 아니면 왕을 죽인 역적이었을까? 판단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다. 강조는 황해도 출신으로 고려 초에 벌어졌던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서북면도순검사에 오른 인물이다. 당시 목종은 병들어 누워있었고, 목종의 친어머니인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을 다음 왕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술수와 편법을 부리고 있었다.
목종은 자신의 보위를 지키기 위해 강조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와 함께 신혈사에 있던 대량원군 순(훗날 현종)도 보호하기 위해 궁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강조는 목종의 부름에 군대를 이끌고 내려오던 도중, 위종정과 최창회에게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강조를 제거하기 위한 함정이니 물러나 훗날을 대비하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는 강조가 개경에 도착하기 전 김치양이 난을 완성하기 위한 함정이었다.
되돌아가던 강조는 아버지가 전한 개경의 소식에 목종이 죽었다 확신하고, 대량원군 순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5천 병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다. 행군 도중 목종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강조는 행군을 멈추고 고민했다. 왕위를 바로 잡으려던 자신의 충심이 목종을 내쫓으려는 역적으로 오인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자신을 믿고 따라온 병졸들이 모두 역적으로 처형될 수 있는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강조는 더 빠른 속도로 개경에 들어갔다. 궁궐을 장악한 강조는 대량원군 순을 현종으로 즉위시키고, 목종과 천추태후를 충주로 유배를 보내는 척 하다가 길에서 죽여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기구를 개혁하고, 이부상서참지정사에 올랐다. 분명 목종을 위해 군대를 움직였던 강조였지만,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해지자 왕을 죽이고 최고의 권력을 잡았다. 이것만 보면 역적이다. 그런데 요 성종의 포로가 되었을 때 항복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 것을 보면 충신이다. 왕을 죽였으나 나라를 배반하지 않았다. 우리는 강조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