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연세대학교의 설성경 교수가 이몽룡은 성이성(1595∼1664)을 모델로 만들어진 인물이라고 발표했다. 이 주장을 근거로 KBS 역사스페셜은 이몽룡이 실제 인물이란 설정으로 접근을 했다. 경북 봉화군에서는 성이성이 살던 계서당을 이몽룡 생가로 소개하고 있다. 정말 이몽룡은 실제 존재했던 성이성일까?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친근한 춘향전은 작자와 만들어진 시기를 알 수 없다고 알려져 왔다. 실제로 조선 후기 여러 설화들이 첨부되어 만들어진 춘향전은 조금씩 이야기가 다르게 전개되는 120여종이 전해진다. 그런데 이몽룡이 실제 인물이라는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이몽룡 생가가 존재하니 궁금증이 생긴다. 그것도 춘향전의 배경이 되는 전라도 남원이 아니라 경상도 봉화라니 말이다.
이몽룡이 성이성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보면 아버지 성안의가 남원부사로 부임하면서, 13~17세까지 남원에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과거에 급제한 뒤, 네 차례에 걸쳐 암행어사가 되어 부정된 관리를 혼내주었고, 관직에 있는 동안 청백리에 뽑힐 정도로 올곧은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특히 이몽룡이 변사또에게 읊은 “금동이의 잘 빚은 술은 많은 사람의 피요. 옥쟁반의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을 짠 것이라. 촛불의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백성들 원성 높구나.” 시가 성이성의 문집에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춘향이의 성(性)도 성이성에게서 가져온 것이라 말한다.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 성이성인지는 모르겠다. 아직은 하나의 학설이며 주장이기 때문이다. 꼭 들어맞는 사실이 아니더라도 춘향전에 일정 부분 반영된 것은 확실하다. 춘향전은 조선후기의 사회 변동이 반영되는 과정에서 실제 인물들의 모습도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춘향이의 이름도 남원에 춘향이가 살았는데 아자재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원귀가 되어 사람들을 괴롭혔다는 전설에 기반한다. 춘향이 원귀를 위해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통해 한을 풀어주었는데, 이때 양진사가 원귀 춘향이에게 쓴 제문이 춘향전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 관리들의 수탈로 삶이 어렵던 시절 박문수와 성이성 같은 올바른 암행어사는 백성들에게 있어 희망이었다. 방자가 외치는 “암행어사 출두요”라는 말은 박문수의 행적에서 동기를 얻었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에 내려오는 여러 설화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 춘향전이다.
그래서 춘향전에는 조선후기 신분제 변동과 수령권 강화 그리고 남존여비가 반영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후 정쟁에서 밀려난 양반들은 일반 농민과 다를 바 없는 잔반으로 몰락하고, 부유한 상민은 공명첩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이 된 현실이 반영되어있다. 이몽룡이 과거에 떨어져 거지와 같은 행색을 갖추고 있던 것은 잔반을 의미하고, 춘향이가 이몽룡과 결혼하여 숙종으로부터 정렬부인의 호칭을 받는 것 등은 당시의 신분제의 변동을 반영한 것이다.
조선 후기 양반의 증가는 몰락으로 이어져, 중앙에서 내려온 수령이 향촌사회를 장악하는 모습을 보였다. 향촌의 양반들은 수령을 견제하기보다는 종속되어 눈치 보기에 바빴다. 그래서 수령들이 백성들을 수탈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이런 사회적 모습이 변사또와 변사또의 기분을 맞추기에 급급한 재지 양반들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춘향전에는 조선시대 굳건하게 자리 잡은 남존여비 사상도 바탕에 깔려 있다. 춘향이를 통해 여성은 지아비에게 정조를 지키고 순종해야 왕에게 칭찬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자연스럽게 여성이 해야 할 일을 남편 받들고 자식을 잘 키우는 일로 한정시켜놓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최근에는 무색할 정도로 과거 영화와 드라마로 자주 제작되던 춘향전이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이몽룡이 실제인물인지에 대한 논의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할리우드에서는 전통 동화와 전설로 세계적으로 흥행을 이끈 영화들을 만든다. 우리의 것이 잊히고 묻히는 현실에서 춘향전과 같은 전통문화가 재조명되었으면 좋겠다. 새로움도 좋지만 과거의 것을 재조명하고 각색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춘향전을 보고 남원 광한루와 봉화 계서당에도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모습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