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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Nov 01. 2019

지역 비하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20세기는 우리 민족이 반만년을 이어온 단일 민족임을 강조했다. 수없이 많은 외침을 겪어야했던 역사에서 하나로 뭉치지 않으면 자유를 잃어버린 채 식민지인으로 살아야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단일민족이라는 틀이 깨지기 시작했다.



전라도 광양



다양화와 세계화로 변하는 흐름 속에 과학적으로도 우리의 DNA에 수백 개의 민족이 섞여있음을 밝혀졌다. 역사적으로도 건국설화나 침략의 과정 그리고 외국에서 들어온 성씨로도 단일 민족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권력을 잡은 민족이나 국가는 다른 민족과 국가의 역사를 왜곡시켰고, 그들이 살던 지역을 비하하며 차별했다. 그와 함께 역설적으로 그들과 자신이 하나의 민족이며 국가라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역사를 살펴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는 같은 언어를 사용했을 뿐,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백제를 흉악하고 해롭다는 뜻의 ‘백잔(百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같은 민족으로 생각한다면 표현할 수 없는 용어다.

백제도 건국설화에서 온조가 고주몽의 친아들이 아니라 우태의 아들이라 표현하며 같은 뿌리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백제의 성왕도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며 고구려와 계통이 다름을 강조했다. 신라의 경우는 박, 석, 김 세 성의 건국 설화에서 다양한 유이민의 유입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경상도 남해

이렇듯 같은 민족이라 생각하지 않던 삼국을 통일 신라가 통일하고 삼한통일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하나의 민족·하나의 국가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통일 신라는 정복한 지역이 언제든 이탈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끊임없이 같은 민족이라는 가치관을 심어주면서도 차별정책을 펴나갔다. 이것이 바로 지역차별의 시작이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훈요 10조에서 차령산맥 남쪽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고 제시했다. 차령산맥 이남은 왕건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후백제가 자리잡았던 충청·전라지역이다. 이 지역이 고려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왕건은 지역 차별을 공식적으로 명시한 것이다.

반면 경상도 지역은 신라 왕족과 6두품 출신들이 고려의 지배계층으로 편입되면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들은 고려가 신라를 계승한 것으로 역사를 바꾸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수도와 거리가 먼만큼 권력의 중심에서 점차 멀어졌다. 고려 말이 되면 경상도와 전라도 모두 하나의 국가였던 시절은 잊히고 고려의 변방지역이 되어버렸다.



전라도 담양

조선시대가 되자 두 지역은 다시 활기를 띄고 지배계층을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오랜 시간동안 축적되어진 역사는 가벼이 볼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함경도 출신이던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지만, 이시애의 난 이후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이 정치권력에서 배제된 것도 한몫했다. 오랜 세월 북방민족의 침입에 맞서 싸우며 강인한 기질을 가진 이들은 내 편일 경우에는 무엇보다 든든했지만, 적이 될 경우 감당하기 어려웠다.

특히 평안도의 경우 명·청의 사신의 접대비, 국방비 등으로 많은 지출을 감당해야 했다. 국가를 위해 많은 희생을 했음에도 돌아오는 것은 지역 차별뿐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서북 지방에는 300년 이래 높은 벼슬을 한 관리가 없고, 혹 과거에 급제한 자도 관직이 현령에 불과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500년의 지역차별은 결국 순조 때의 홍경래의 난으로 이어졌다. 홍경래전에 ‘평안도 사람들은 더욱 당세에 쓰이지 못하였다. 조선 초에는 고려 유민이라 하여 위험시하여 쓰지 않았고, 나중에는 천하게 여겨서 쓰지 않았다. 한양의 하인배나 충청도의 졸개 따위에 이르기까지 서북인을 '사람'이라 부르지 않고 '놈'이라 하였다. 서북 지방의 감사, 수령들은 백성의 재물 토색하기를 다반사로 여겼는데 이 또한 서북민을 내심으로 천시한 까닭이다.’라고 쓰여 있다.



경상도 합천



그러나 평안도 지역도 옛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였다. 과거 한반도와 만주를 호령했던 역사와 기상이 어려 있는 지역이다. 평안도에서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에서 조만식 선생을 비롯한 많은 민족지도자와 독립단체가 많이 생겨나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평안도에 대한 지역차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은 경상도와 전라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중기에 접어들자 두 지역도 점차 권력에서 배제되어 갔다. 경상도의 경우 ‘경상도 문동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린 아이들이 모두 책을 들고 공부할 정도로 학구열이 높은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황의 동인계열이 정계에서 밀려나면서 조선 후기 유생들만 가득해졌고, ‘경상도 문동이’는 와전되어 ‘경상도 문둥이’ 또는 ‘보리 문둥이(보리밥이나 먹는 문둥이)’로 지역을 비하하는 용어가 나타났다.

전라도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선조 때 정여립의 난으로 수천 명의 유생들이 죽임을 당하면서 역적의 땅이 되었다. 여기에는 경제적인 부분도 크게 작용했다. 조선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은 단연 호남이었다. 다시 말하면 수탈하기에 가장 좋은 지역이었다. 그래서 전라도에 뛰어난 인재가 나오는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전라도 내장산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감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역감정이 있었다고 하면 많은 관료를 배출하는 경기도와 충청도에 가져야 하는 것이 옳았다.

그럼 언제부터 전라도와 경상도의 사이가 좋아지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광복 이후의 역사에서 기인한 것이 많다. 근현대사에서 전라도 지역이 비하된 시작은 이승만과 관련이 깊다. 하와이 사람들이 지지하지 않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던 이승만이 전라도 사람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해서 ‘전라도 하와이’가 나왔다는 말과 6.25전쟁 당시 하와이 출신 미군부대가 패퇴하면서 붙여졌다는 이야기 등 여러 설이 있다. 또한 여수순천사건을 공산당이 일으킨 폭동으로 여겼고,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으로 올라가지 못한 공산당이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했던 역사를 가지고 ‘전라도 빨갱이’란 말이 나왔다. 이 외에도 ‘전라도 깽깽이’란 말도 있다.

사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차별과 감정은 1970년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전라도와 경상도는 오히려 부정 독재에 같은 뜻을 가지고 맞서 싸우고자 일어섰던 동지와 같은 곳이었다. 두 지역의 감정이 생긴 가장 큰 원인은 경제 중심축이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에 맞추어지면서 생활수준이 달라진 것이었다. 박정희는 경상도 출신이지만 60년대 전라도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그런데 지지한 만큼 전라도에 경제적 혜택이 오지 않으며 감정의 골이 파이기 시작했다.



경상도 통영

여기에 박정희 독재에 맞서던 두 야당의 리더였던 김대중과 김영삼의 결별도 한 몫을 차지했다. 특히 1980년 전두환의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전라도 광주가 공산당 소굴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희생당하며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특히 제5공화국이 독재에 대한 비판을 막고자 지역감정을 활용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갔다. 1980년대 경상도 사람은 해태 과자를 먹지 않았고, 전라도 사람은 롯데 과자를 먹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호남과 영남의 인구수도 한 몫한다. 호남의 인구는 2018년 기준으로 전라도는 약510만 명, 경상도는 1300만 명이다. 전라도보다 경상도의 인구가 두 배를 넘는다는 것은 정치인들이 지역감정을 조장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역감정이란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만든 프레임이고, 역사도 그 틀에 맞추기 위해 왜곡되었음을 우리는 이제 안다. 그리고 지역감정이 사라지고 있음도 안다. 오히려 세대 간의 갈등이 더 커지고 있음에 걱정한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일부 정치인들은 지역 색깔을 가지고 나온다. 과거 다른 지역을 비하하던 ‘인천 짠돌이’, ‘충청 핫바지’, ‘서울 뺀질이’ 등이 잊힌 사실을 기억하면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감정과 비하하는 말들이 앞으로는 사라져야 할 낡은 프레임을 알 수 있다.



서울 숭례문

이제는 과거의 작은 대한민국이 아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국가는 우리 자신이 아닌 미국, 중국, 일본 등 우리보다 국력이 더 강한 나라들이다. 우리가 하나가 되지 않고 서로를 힐책하고 비난한다면 다시 예전의 약소국으로 갈 수 있다. 우리의 적은 안이 아니라 밖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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