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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Oct 12. 2019

형수를 아내로 맞은 고구려 산상왕


과거 혼인은 단순히 개인 간의 만남이 아니었다. 부족과 부족 또는 가문과 가문의 결합으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거나 확장시키는 정치적인 도구였다. 고대 북방 민족에게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형사취수제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는 자신이 속한 부족의 세력 약화를 막기 위한 장치였다. 북방의 강자였던 고구려도 오랫동안 형사취수제가 운영되었다. 형사취수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고구려 제10대 산상왕(재위 197~227)이 형수 우씨와 혼인한 사건이다.





아들이 없던 제9대 고국천왕이 한밤중에 갑작스럽게 죽었다. 아내였던 왕후 우씨는 후계자 문제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고국천왕의 죽음이 가져올 문제가 걱정되었다. 고국천왕의 형제(발기, 연우, 계수)간에 벌어질 왕위쟁탈전에서 누가 이기든 왕후와 왕후의 부족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우씨는 차기 왕을 본인이 선택하기로 마음먹는다. 왕을 만들어주는 대가로 시동생과 결혼하여 자신의 부족 절노부(연나부)를 지켜내고자 했다. 이는 고국천왕이 부족적인 전통의 5부(순노, 소노, 관노, 절노, 계루부)를 행정적인 5부(동,서,남,북,중부)로 개편했음에도 여전히 전통적인 부족 영향력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고구려에 형사취수제 전통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우씨는 먼저 발기를 찾아가서 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다음 왕이 되는 것이 어떤지 물었다. 발기는 형인 고국천왕이 죽지도 않았는데 후계자를 논의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 꾸짖으며, 밤늦게 돌아다니는 우씨의 행실까지도 비난하였다. 이에 우씨는 마음에 상처를 입고 연우의 집을 찾았다.





연우는 우씨가 찾아오자 술과 음식을 내오며 반갑게 맞이했다. 발기에게 무안을 당했던 우씨는 자신을 대접해주는 연우에게 마음을 열고, 고국천왕의 죽음을 알리며 다음 왕이 되기를 권했다. 발기보다 왕위 계승권 순위가 낮았던 연우는 우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입궁한다. 다음날 우씨는 고국천왕이 연우를 다음 후계자로 삼았다는 유언을 발표했다. 이후 제10대 산상왕이 된 연우는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형수 우씨와 혼인했다.

동생 연우와 왕후 우씨가 왕의 자리를 빼앗은 것에 분개함을 감추지 못한 발기는 요동의 공손탁을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의 왕위를 되찾기 위해 군사 3만을 얻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 때 소노부의 사람들이 발기를 따랐다.

산상왕은 발기가 이끌고 오는 군대를 막기 위해 막내 계수를 내보냈다. 이는 매우 훌륭한 선택이었다. 왕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계수의 심중을 파악하면서, 발기가 형제들과 국가를 배신했다는 죄명을 씌울 수 있었다. 산상왕의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계수는 중국 군대를 끌고 온 발기를 꾸짖으며, 대의명분이 고구려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국을 침략했다는 부끄러움에 발기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분열되던 고구려는 하나로 뭉칠 수 있게 되었다.





발기를 따르는 세력을 제거한 산상왕은 수도를 지안현(환도)로 옮기며 왕권을 한층 강화시켰다. 이와 함께 우씨와 절노부를 권력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관노부의 소후에게서 아들(동천왕)을 낳고 왕위를 물려준다. 기록에 따르면 산상왕이 제사상에 올리려던 돼지를 쫓다가 만난 처녀에게서 아들을 얻은 것은 하늘의 뜻이라 강조한다. 하지만 산상왕이 우씨와 절노부를 권력에서 배제시키려고 일부러 아이를 다른 부족에게서 낳은 것은 아닐까? 산상왕은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왕권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고구려에 형사취수제가 있었음을 보여주며, 우리의 뿌리가 광활한 북방이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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