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제21대왕 개로왕(재위 455~175)은 고구려 첩자 도림의 꾀에 빠져 한강 유역을 상실한 어리석은 인물로 표현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개로왕은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온 도림이라는 승려와의 바둑에서 진다. 이후 다시 도림을 불러 바둑을 두는데 둘의 실력이 막상막하로 우월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자고로 모든 경기는 근소한 차로 승리할 때, 가장 재미있다. 개로왕은 도림과 바둑 두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정사에 소홀해졌다. 나랏일에 신경을 쓰라는 신하들의 간곡한 충언이 개로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만큼, 자신을 즐겁게 하는 도림을 더욱 신임했다. 개로왕의 마음을 얻은 도림은 신하들의 충언이 왕을 무시하는 처사라 비난했다. 그리고 왕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개로왕의 아버지인 비유왕의 무덤과 궁궐을 크게 확장하라고 꼬드겼다.
도림의 말을 옳게 여긴 개로왕의 무리한 토목공사는 백성들의 반발을 가져왔다. 개로왕이 민심을 잃자, 고구려의 장수왕은 3만의 군대로 백제의 수도 한성(오늘날 서울)을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개로왕은 아차산에서 옛 부하였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 내뱉은 침을 맞는 모욕을 당하며 목숨을 잃었다.
삼국사기의 기록만 본다면 개로왕은 백제를 위기에 빠뜨린 죄를 변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과연 삼국사기의 내용이 진실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5세기 장수왕이 이끌던 고구려는 동북아시아 최강의 나라였다. 반면 백제는 전성기가 지나 기울어져 가는 나라였다. 백제는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에게 패배한 이후, 비유왕이 433년 신라와 나·제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해야 할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비유왕의 아들이었던 개로왕은 과거 백제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즉위 초부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비유왕의 능과 궁궐을 재정비하는 과정을 통해 백제의 국력이 약하지 않음을 대내외적으로 알렸다. 또한 국방력 강화를 위해 고구려와 영토가 가까운 쌍현성을 수리하고, 청목령에는 큰 목책을 세웠다. 또한 고구려의 한성 침략을 막기 위해 한강변에 둑과 성곽을 쌓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백성들의 원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장의 위험이 없는 상황에서 노역을 반겨할 백성은 없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472년 개로왕이 북위로 사신을 보내 고구려 협공을 제의한 것이 백제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장수왕은 중국 여러 왕조와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광개토대왕으로부터 매서운 맛을 본 중국 왕조들은 고구려와의 평화적 분위기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개로왕이 고구려 침략을 도모한 것은 고구려 장수왕에게 백제를 침공할 충분한 명분이 되었다. 475년 장수왕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한성으로 쳐들어왔다.
개로왕은 무책임한 군주는 아니었다. 역사에서 자신의 보위만을 위해 도망쳤던 왕들과는 다르게 끝까지 나라를 지키려했다. 아들 문주왕에게 자신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 한성을 도망쳐 훗날을 도모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7일 동안 고구려군을 맞이하여 분전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백제군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북성이 함락되고 남성이 무너지자 개로왕은 산에 들어가 항전하기 위해 아차산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곳은 고구려에 투항한 백제 장수가 개로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 백제 장수였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에게 붙잡힌 개로왕은 온갖 모욕을 당하며 죽었지만, 그 덕분에 백제는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문주왕이 데려온 신라 원군 1만이 도착하고, 백제군이 정비되자 고구려는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문주왕은 아버지 개로왕을 잃었지만, 웅진에 새 수도를 잡고 500년의 백제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보았을 때, 개로왕은 어리석은 왕이 아니라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다 실패한 개혁군주는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