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강화도로 MT를 가며 지나쳐갔던 김포에 대한 기억은 끝없이 펼쳐진 논이었다. 버스를 타고 논길을 달리다 어촌마을을 만나면 강화도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하곤 했다. 농촌과 어촌이 어우러진 모습으로 기억되던 김포가 최근 많은 변화를 통해 도시로 거듭났다. 높은 건물과 넓은 도로로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제는 새롭게 변해가는 모습에서 옛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김포가 되었다. 그 방안으로 김포는 역사를 통해 지역에 대한 애향심을 높이기 위해 김포독립운동기념관을 세우고, 조헌을 기리는 중봉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조헌(1544~1592)은 1592년 왜군을 맞아 금산에서 호남을 지켜낸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충북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충남 금산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돌아가셨기에 대부분이 김포와 선뜻 연관시키지 못한다. 김포에 사시거나 애정이 많은 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조헌이 김포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조헌을 기리는 우저서원을 잘 관리하고 중봉 문화제를 개최하는 모습에서 점차 김포를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질 것이라 예상된다.
조헌의 집안은 오래도록 김포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조헌의 할아버지가 김포 통진에서 감정리로 옮겨왔다는 점만 보더라도 김포에 뿌리를 내리고 오래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저서원을 마주 보았을 때 좌측으로 수령 500년이 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아마도 조헌 집안이 이곳에 자리 잡을 무렵 심어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우저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조헌이 태어난 곳으로 유허지이기도 하다. 이곳 우저서원 자리에서 태어난 조헌은 22살에 성균관에 입학하고 2년 뒤에 관직에 나갈 정도로 우수한 인재였다. 이이 밑에서 현실적인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웠던 조헌은 늘 직선적으로 개혁을 강조했다. 사치스러운 풍조를 없애기 위해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 평등하게 입을 것을 주장하는 등 당시로써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도 서슴지 않고 발언하였다. 왕이던 선조에게도 궁중 향실에서 봉향 관행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는 <논향축소>를 올리는 등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강직한 인물이었다. 왕을 비롯한 사회지도계층에게 바른 소리를 하면서 관직에서 쫓겨나기도 여러 번이었다. 여기에는 선조에 의해 조장된 동인과 서인의 갈등으로 많은 이들이 관직에서 쫓겨나고 죽음을 당하던 시대도 한몫한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북 옥천에서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였다. 평소 백성과 나라를 사랑하던 조헌이 의병을 조직하자 1,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조헌은 자신을 찾아온 의병을 데리고 청주성을 수복하는데 큰 기여를 하며 백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선조가 백성들을 버리고 북으로 도망가면서 온갖 욕설을 받아야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조헌의 충주성 수복은 매우 큰 일이었으나, 왜에 밀리던 상황을 반전시키지는 못하였다. 왜는 조선에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호남을 매섭게 공격하던 중이었다. 권율이 이끄는 관군과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이 고바야카 다카카게가 이끄는 왜군을 맞아 금산에서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관군이 왜군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으면서 고경명이 전사하고, 전세가 불리해졌다. 조헌은 금산으로 내려가 금산성에 있는 왜군을 섬멸하자고 주장했으나, 권율을 비롯한 대부분이 전열을 가다듬고 때를 기다리자며 만류하였다.
조헌은 이에 굴하지 않고 700여 명의 의병을 데리고 금산성으로 달려갔다. 이에 영규 스님이 800명의 승병을 데리고 조헌의 부대에 합류하였다. 1,500여 명의 의병과 승병만이 금산성에 온 것을 확인한 왜는 자신만만하게 공격하였다. 조헌과 영규 스님은 이에 굴하지 않고 왜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전사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상대한 만큼 왜는 승리했지만, 그 피해가 매우 컸다. 결국 큰 피해를 본 왜가 호남을 포기하고 옥천으로 회군하면서 7년간의 전란을 견딜 수 있는 호남이 지켜질 수 있었다.
매우 위급했던 임진왜란 초 조선이 버틸 수 있도록 호남을 지켰고, 모든 이들에게 충절의 모범이 된 조헌을 기리는 것은 국가로서 당연한 해야 할 일이었다. 1617년 조헌이 태어난 곳에 유허 추모비를 세우고, 1648년에 유허지에 조헌의 학문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사원을 세웠다. 이후 신하들에게 충을 강조했던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우저서원이란 사액을 내렸다.
우저서원은 이후 김포의 많은 젊은이에게 충효를 가르치며 교육과 인재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다른 서원처럼 백성을 수탈하고 국가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던 우저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도 피해갈 수 있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원과 비교했을 때, 우저서원의 규모나 화려함이 적은 것을 보면 왜 47개소에 들어갔는지 짐작된다.
우저서원은 전학후묘의 구조로 처음으로 사람을 맞이하는 외삼문에 들어서면 좌우로 학생들이 머물던 동재와 서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앞에 유생들이 공부하던 여택당이 자리하고 있다. 여택당을 뒤로하고 들어가면 조헌의 시호인 <문열>을 딴 문열사가 있다. 문열사에는 조헌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우저서원의 핵심공간이며, 그 오른쪽으로 조헌 선생 유허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우저서원의 전각은 전체적으로 잘 관리가 되어있는 듯 보였으나, 방문하는 사람에게는 당혹감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부슬비가 내리는 평일에 찾아간 우저서원은 김포로 들어가는 큰 길목이 아닌 외곽에 위치하고 있다. 내비게이션에서 엉뚱한 곳으로 안내를 해주어 어렵게 차를 돌려 찾아간 우저서원은 문이 잠겨있었다. 우저서원 어디에도 관리하는 사무소의 연락처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저서원 주변을 30여 분 맴돌며 밖에서 사진을 찍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외삼문 가까이 다가갔다. 자물쇠로 채워져 있는 듯 보였던 문을 미는 순간 스르르 열렸다. 한쪽 고리에 자물쇠를 채워놓고 그 위로 옆의 고리를 걸쳐져 있었던 것이다. 서원에 들어서도 되는지 고민하던 중 연락처도 없고, 나중에 다시 방문하기도 쉽지 않다는 생각에 서원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행동이 잘못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원 내부를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빠른 속도로 둘러보고 나왔다. 둘러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찝찝했다. 그리고 안타까웠다.
사실 유명 사원이나 향교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잘 방문하지 않는다. 관할 지자체에서 관리하는데에도 분명 한계가 있어, 문이 잠겨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사람도 많이 찾지 않는 곳에 관리인을 배치하는 문제는 깊이 고려될 문제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역사적 장소를 편안하게 방문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